[2022]22.09.24 하버마스 3차

조회수 513


도서: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분량: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11p) 까지

장소: 서강대학교 다산관

발제자: 신채린, 박혜형


1부 (15:00-15:30) : 책 내용 관련 퀴즈 / 정석훈 

2부 (15:40-16:40) :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셋째 강의 '헤겔좌파, 우파, 니체'  / 신채린

3부(16:50-17:50) :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넷째 강의 '탈현대로의 진입: 니체' / 박혜형



1부


하버마스 3차 모임 1부는 제4장 (니체)에 관련한 퀴즈로 시작되었습니다. 1) 니체의 '진리'에 대한 생각은 어떤 사상가들과 더 친한가? 2) 니체의 도덕은 무엇에 더 가까운가?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문과 기존 텍스트 및 자신의 견해 등을 활용해 서술해주세요.


니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겠는데요, 실상 니체는 소피스트에 가깝다는 평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도서로는 리오타르의 <니체와 소피스트: 우리에게 필요한 논리> 를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니체의 도덕은 귀족의 도덕에 가깝습니다. 이와 관련한 도서로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2부


2부는 셋째 강의 텍스트 읽기를 가이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버마스는 셋째 강의에서 19세기 헤겔좌파, 헤겔우파, 그리고 니체가 대립했던 역사는 이제 진부한 것이라 선언합니다. 세 그룹에 내재한 문제점이 무엇인지 말하기 위해 각각의 그룹에 대한 역사와 설명을 전개하며,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에 대한 비판에 많은 부분을 할애합니다.


먼저 하버마스는 철학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칸트 시대 때부터 짚으며 오늘날 우리가 가진 철학적 입장은 헤겔 좌파에 다름아님을 밝히고자 합니다. 헤겔 이후 시작된 현대성 담론으로 인해 우리는 과거/현재/미래를 즉각적으로 인식하며 실존적 예리함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도 중간에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시대를 진단함으로써 과거는 역사의 위기 과정으로, 현재는 비판적인 분열 상태로, 그리고 미래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 상태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버마스가 진단하는 현대성 담론의 전제는 '철학의 종말'입니다. 철학이 제 역학을 잃었다는 것이지요. 이는 칸트가 '강단개념' 과 '세계개념'을 나누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헤겔이 다시 합쳤지만 이후 유물론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집필하며 철학에 다시 시대 진단의 역할을 부여하지만, 하버마스가 보기에 이는 철학의 종말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장치에 다름 아닙니다.



*이번 장에서 중요한 개념인 헤겔좌파/우파에 대한 간략 설명을 살펴보겠습니다.


헤겔 좌파/우파의 분열은 1835년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삶> 이후로 시작되었다.


35년의 독일에서의 철도 개통과 같은 현실의 움직임과 맞물려 시대의 전환기 · 세대 교체기의 의식이 높아지고 있던 35년에 D.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가 출판되었다. 그는 이 저작에서 복음서의 예수전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정하고 예수 이야기는 원시 기독교 교단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신화일 뿐이라는 점, 신성과 인간의 합일은 하나의 인격에서가 아니라 인류에서 실현된다는 점 등을 설파해 학파 내외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에 이은 『논쟁집』에서 자신의 입장을 헤겔 좌파, 그에 대한 반대파를 우파, 중간을 중앙파로 분류했는데, 그가 헤겔 좌파로서 이름을 거론한 것은 구체적으로는 그 자신뿐이며, 이에 반대하는 우파로서는 괴셸, 가블러, 브루노 바우어, 중앙파로서는 로젠크란츠의 이름을 들었을 뿐이었다. 슈트라우스의 이 작품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헤겔학파는 분열을 향해 한 걸음을 크게 내딛게 되었으며, 논쟁의 중심문제는 종교 · 기독교를 헤겔 철학전체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이냐는 점에 귀착되었다.<노동자의 책,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5994>


헤겔 우파: 노년 헤겔주의. 세겔의 철학을 궁극의 완성상태로 본다. 헤겔 철학을 계속 지켜 헤겔 저작집의 간행, 헤겔 철학의 해설 작업에 노력했다. 후세에 신헤겔주의로 연결된다. 인물로는 Gg. 가플러(Gabler), H. Fr. 하인릭스(Heinrichs), K. Fr 괴셀(Goschel), 딜타이, 빈데발트, 크로체가 있다.


헤겔 좌파: 헤겔의 변증법에 의존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발전한다. 헤겔 철학을 정치와 사회 현실에 맞도록 변형했으며 노동 개념을 다루었다. 이들은 이성을 신봉했으며 이성의 선구자가 되는 것이 자기들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헤겔과 마찬가지로 이성이 전개되는 과정의 최종은 어떤 궁극적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라 믿었는데, 그것이 분열에 의해 선도되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저작 속에 드러난다. 이는 집필된 글안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결정을 촉구하는 맥락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물로는 포이어바흐(Feuerbach), A. 루우게(Ruge), K. 마르크스(Marx), Fr. 엥겔스(Engles), M. 슈티르너(Stiner) 등이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하버마스는 우리가 여전히 헤겔좌파와 동일한 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헤겔좌파는 헤겔이 도외시했던 인간 실존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학파입니다. 헤겔은 육체, 인간의 실존이 영혼의 실현이라고 보았고, 법철학에서도 인간은 외적 제재인 추상법의 지배를 받아야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헤겔좌파는 포이어바흐를 시작으로 본격 전개되는데, 포어이바흐는 종교적 소외를, 마르크스는 노동 소외를 주창하며 점점 인간 실존에 극적으로 초점을 맞춘 노동 운동의 흐름을 띠게 됩니다. 종교적 소외란, 인간이 만든 종교 세계 안에서 신이 주가 되고 인간이 종속적인 관계로 놓임을 비판했던 것을 말합니다.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인간의 노동을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했던 것이지요. 



하버마스는 셋째 강의에서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을 집요하게 분석하는데, 마르크스와 노동, 노동 소외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르크스가 본 자본주의 기업활동엔 내재된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자본 (미래에 자산을 증식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화폐, 기계 등) 2) 노동입니다. 자본을 가진 자는 자본가가 되는데 자본을 축적하려면 노동이 필요하죠. 여기서 자본 <-> 노동의 상호 협력 관계가 맺어지고 마르크스는 이 관계에서 노동자가 상품에서 소외되는 것을 포착합니다.


노동자가 열심히 노동해서 상품을 만들었지만 상품은 그 노동자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자동차를 만든 노동자는 자동차를 소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오늘 힘드니까 일 안해야지 ~ 하면 직장에서 해고 되겠죠. 이것을 부르주아(유산게급, 지배자)와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피지배자)의 관계라고 마르크스는 설명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본래적 가치를 자기의 본질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의 본질이 왜곡된다고 보았고 노동 분업이 진행될수록 노동자는 노동과 소통하지 못한 채 노동자는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노동소외'의 개념입니다. 소외는 자신의 본질을 상실한 상태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마르크스에게 국가는 사회의 기능적 명령을 수행하는 장일 뿐 국가 자체는 파열된 인륜성의 표현이었습니다. 헤겔이 법철학에서 말했던 인륜적 총체성이 실현되려면 인간 실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인식에 특권을 부여하는 반성철학은 정신의 형성과정을 의식화의 과정으로서 파악한다. 행위주체와 조작 가능한 대상들의 세계에 특권을 부여하는 실천철학은 유적 존재의 형성과정을 자기생산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실천철학에 있어서 현대성의 원리로서 타당한 것은 자기의식이 아니라 노동이다. 88p


하버마스는 마르크스가 인간 행위를 노동 중심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생산 패러다임으로 갔다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즉, 마르크스의 사상 내부엔 정치의 규범적 토대를 설명할 것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립니다.


1) 마르크스의 노동을 통한 자기실현은 낭만주의적인 개념일 뿐이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위(목적합리성)만으로도 상품의 가치는 정당화 될 수 있다. 


2) 마르크스는 노동가치이론의 전제조건 속에 실천개념이 가지고 있는 의심스러운 규범적 내용을 암암리에 수용한다.


3)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은 노동개념에 내재하고 있는 목적합리성과 함께 계속해서 이의적이다. 


즉, 객관적 노동가치라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주장하며 마르크스는 계속해서 아포리아로 빠진다고 본 것입니다. 소외된 노동 이론을 계속 따르게 되면 생산과정이 부정됩니다. 생산을 가능케 하는 구조가 배제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난점들은 비판적 사회이론의 과제를 수행하기에도 부족하다고 언급합니다. (부언설명 102p-110p 참고)



이로써 계몽주의와 헤겔좌파의 실천철학은 모두 같은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주체중심적 이성이 스스로 말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계몽주의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힘을 발휘했던 이성이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실천철학에서는 인간이 해방되기 위해 만든 노동이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거꾸로 인간이 노예처럼 노동에 예속되고 소외되게 되었습니다. 


하버마스는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던 다른 집단들, 예를 들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그리고 헤겔우파(신보수주의)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마르크스의 아포리아를 극복하지 않고 '미메시스'라는 개념을 통해 그대로 전개하려 했지만, 하버마스가 보기에 미메시스는 심미적인 개념으로 이성에 제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미메시스는 '불사조'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불사조를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기까지 하지만, 그건 이성적인 개념도 현실에 적용 가능한 개념도 아닙니다. 



헤겔우파(신보수주의)는 요아힘 리터의 작업을 토대로 설명을 전개하는데. 결과적으로 두 가지 내용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1) 헤겔우파는 전통주의이다. 전통주의는 도덕적 보편주의가 가지고 있는 구성적, 비판적 관점의 권리를 박탈하고, 마찬가지로 아방가르드적 예술이 지닌 창조적 반혁적 힘을 빼앗는다. 이는 과거지향적 미학이다.


2) 니체는 헤겔우파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평가한 초기 낭만주의 모티브에 영향을 받아 이전까지 시도되었던 모든 논의를 뒤집는 '이성의 제거'를 시도한다. 하지만 여전히 주체철학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우리는 계몽의 변증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는 의사소통 이론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셋째 장 최종 진단이었습니다.


3부



3부에서는 넷째 강의 '탈현대로의 진입: 니체' 를 다루었습니다. 넷째 강의는 니체에 대한 개괄에 가까우며 ppt 발표를 중심으로 니체가 바그너와 맺었던 관계, 그리고 니체가 주장했던 위버맨쉬에 대한 설명 등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넷째 강의의 목적과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니체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새로운 사유 체제를 전개하고자 한다. 니체는 예술을 통한 구원을 강조한 바그너의 아이디어에 착안하여 독창적인 사유 체재를 기획한다. 바그너의 모티브는 이미 낭만주의 초기 철학자인 셸링과 슈레겔을 통해 형성된 맥락 아래에서 발생했다. 초기 낭만주의는 디오니소스 신화에 주목하는데 서양과의 결별을 지양하기보다 재생을 목표로 한다. 니체는 이러한 입장과는 거리를 두면서도 후에 디오니소스를 적극적으로 그의 철학에 등장시킨다. 니체는 바그너와 결별 후 더욱 급진화된 신화론을 전개한다. 또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무엇인지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진입하기 위한 조건을 말하며 디오니소스를 더 이상 신화속이 한 명의 개별신이 아닌 철학함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메타포로 변모시킨다. 끝으로 하이데거와 바타이유의 니체 철학 분석 및 이에 대한 하버마스의 총평으로 장이 마무리된다.



니체는 이성의 개념을 새롭게 수정하는것을 포기하고 계몽의 변증법적 사유 형태에서 완전히 탈피합니다. 또한 기존의 역사적 지식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데요. 대신, 신화적 사유를 도입하여 이성의 사각지대였던 인간 본능의 영역을 되살리고자 합니다. 새로운 현대성 담론을 전개 하기 위해 니체는 바그너의 모티브에 주목합니다.


우선, 니체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를 들으며 매혹되었고 자신의 사상적 기반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과 무신론에 둡니다. 괴테 이후 아폴론적으로만 해석된 그리스 문화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회복하려고 시도했던 것이죠. 아폴론은 질서 정연한 형식의 신입니다. 미를 창조하며 개별적인 것의 원리가 되는 존재입니다. 디오니소스는 카오스와 황홀경의 신으로 형식을 파괴하며 통제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여기서 느낌 오시나요?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회복하려 합니다. 즉, 포스트모던의 발전소 격이 되어 이후 데리다, 푸코, 들뢰즈, 리오타르, 보드리야르가 니체를 계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Wagner - Tristan und Isolde, 바그너 - 트리스탄과 이졸데>

 

“종교가 예술가적으로 된다면, 종교의 핵심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예술에 유보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튼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통합을 포착합니다. 바그너에 따르면 진리는 예술을 통해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예술적으로 재생된 신화론이 경쟁 사회에서 경직된 사회적 통합의 힘을 다시 풀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니체와 바그너의 모티브는 셸링과 슈레겔을 통해 발견되게 됩니다. 셸링에 따르면 이성의 최고 행위는 ‘예술적 직관’입니다. 그의 예술철학에 따르면 자아의 지식은 끊임없이 산출(변화)되기 때문에 진리와 선의 결합을 하는 것인데, 즉 지식(관념)과 현실(실재)의 일치는 그에게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진리와 선은 오직 아름다움 속에서만 결합한다.’ 이러한 일치를 수행하는 것은 미적 직관이며 그에 따르면 완성된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것은 자아가 스스로에 대해 할 수 있는 최고의 객관화입니다.


 “자연과 역사에서 분리된 것, 삶과 행위와 사유 속에서 영원히 도주해야만 하는 것이 영원한 근원적 통일 속에서 하나의 불꽃이 되어 타오르는 곳에서 예술은 가장 성스러운 것을 철학자에게 밝혀주기 때문에, 예술은 철학자에게 최고의 것이다.”



슐레겔에 따르면 오직 현대예술만이 현대에 들어와 고갈된 사회적 통합의 태고적 원천들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신화론은 분열된 현대가 근원의 혼돈을 이성의 타자로 생각하고 이와 관계 맺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죠. 이와 관련해 낭만주의적메시아주의는'디오니소스'를 요청합니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도를 대체해 구원을 가져다 줄 하나의 상징이 됩니다. 



니체는 바그너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의 낭만주의 결합에 여전히 구속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아폴로적 아름다움의 제한’이 ‘디오니소스적 축제’를 통해 나타나는 것들을 은폐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니체는 이제 바그너와 단절하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에도 머물지 않고 자신의 독창적인 기획을 전개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아폴로적 규칙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는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자기 망각으로 침잠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개인은 자신의 경계와 제한 속에 있음에도 아폴로적인 것의 구속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니체에게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란 주관적인 것이 고양되어 완전한 자기망각에 까지 이른 상태입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예술은 무아경의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개인의 탈경계화와 내면과 외면에 있는 무형적 자연과는 융해라는 희생을 치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족될 때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종국에 니체는 디오니소스가 철학자이며 자기자신을 이 철학하는 신의 마지막 사도와 대가라고 천명하게 됩니다.


이제 니체는 모든 형이상학, 종교, 도덕 및 예술에 나타나는 관념론의 요소들을 비판합니다. 그리스도교를 비롯해 유럽 철학의 본질주의, 이상주의 및 도덕은 약자나 노예가 강자나 귀족에 대해 지니는 원한 내지 복수 감정의 표출이라고 보게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이념을 포함한 '저 너머의 세상'의 것은 모두 인간이 자신의 소망을 투영한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이것이 인간 세상의 좋은 것들을 빼앗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2,000년간 유럽의 사상을 지배해 왔으므로 니체에게 유럽의 문화는 허무와 퇴폐로 향하고 있던 것입니다.


'서양적 정신은 파국을 향해 달리고 있다.' _ 니체


이런 분열에서 구원되려면, 전승되어오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말합니다. '신은 죽었다.'


니체는 신의 지배 하에 있는 인간이 아니라, 대지의 주인을 의미하는 초인을 새로운 가치의 최고 실현자로서 그리스도교의 신을 대신해 등장시켰습니다. 초인은 인생의 무의미를 감내할 수 있는 자이며,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자 입니다. 니체가 파악한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면서 도태와 생존 투쟁을 통해 살아남은 자연의 최강자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본질은 '힘에의 의지'인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줄이기 때문에 인간은 매 순간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가 됩니다. 인간은 극복되어야만 될 무엇이 되었습니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란 동일자의 반복 즉, 인간이 늘 자기를 초월해야만 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힘에의 의지는 자연적인 것으로 가장 자연적이고 건강한 상태입니다.  언뜻 이상해 보이는 니체이지만, 나의 상승을 위해 이타적이어야 함이 전제되어있습니다. 오로지 나 혼자만을 위한 상승이 아닌. 다중심성인 것입니다. 


니체의 사상이 현대적 의의를 지니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원론의 세계를 일원론으로 전환시켰다. (신은 죽었다.) 2) 절대론에서 다원론으로 전환시켰다. (우리의 인식에 관한 내용. 하나의 중심이란 없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_차라투스트라. 즉 모든게 다 동등하다) 3)실체론을 관계론으로 전환시켰다. (자기 존립성 + 자기동일성을 가진 것이 실제로 있다. 즉 이것이 '존재' 혹은 '신'이었는데 니체는 그러한 실체란 없고 어떤 것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관계 맺는 것들이 꼭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버마스는 니체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요? 궁금하다면 넷째 강의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독서에 지각생은 없습니다.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