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2.09.20 인간 너머의 인간 읽기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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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인간 너머의 인간』

분량: 『인간 너머의 인간』5-8장

장소: 서강대학교 다산관



서강대학교에서 진행된 '포스트휴머니즘' 관련 도서 읽기 모임입니다. 참고로 강의실을 빌린 장소가 서강대학교인 것이지 서강대학교 측에서 대표성을 갖고 본 책의 내용을 진단한 것이 아님을 먼저 알려드립니다.


이번엔 『인간 너머의 인간』 5-8장을 읽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4장은 학술 논문인데 비해 5-8장은 짧막한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강금실 전 장관의 '지구법학'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7장은 <사이보그라도 괜찮아> 영화를 통해 포스트 담론을 읽어내려는 시도가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한신대학교 구성원 분들이 집필한 내용이라 그런지 민중신학으로 텍스트나 영상을 해석하려는 시도도 많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지구법'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논의했던 내용들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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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ESG: Three letters that won't save the planet” 이라는 아티클이 영국의 주간지인《The Economist》에 게재됐다. 제목에서 읽을 수 있듯 해당 아티클은 ESG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해당 주차에 ESG를 특집기사로 다루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코노미스트지도 2019년에는 기후변화에 대해서 다뤘을 정도로 지구온난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비판적 성찰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지만, 작금의 ESG열풍에 대해서는 반기를 드는 모양이다.


ESG는 환경주의 운동의 연장선이다. 최근 환경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경계와 비판적 의식을 갖고서 바라볼 것을 주문하고 싶다. 게다가 이 ‘환경주의’의 너머에 있는 ‘지구법학’이라는 것을 상상함에 있어서는 생각보다 더 어려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물론 그것들의 개념을 공부하는 데 있어 수반되는 어려움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먼저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모든 전제들을 확정짓는 것부터 어려움이 시작된다.



《인간 너머의 인간》의 저자로 참여한 강금실 前법무부장관은 ‘인류세’와 같은 개념들을 글에 도입하여 (i) 우리가 지구에 ‘환경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이것이 매우 시급한 과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두 가지 전제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이다. 최근 베스트셀러로 명성을 떨친 마이클 셸런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는 소위 <종말론적 환경주의>라고 하는 것의 많은 ‘허점’을 짚어낸다.


① 일단은 우리가 정말로 지구 환경에 ‘영구적 영향’을 미칠 만큼의 힘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있다. 예컨대, 우리는 흔히 핵폭탄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지나 않을까 걱정하곤 한다. 하지만 지구상의 핵폭탄을 모두 터뜨린다고 하더라도 지구의 입장에서는 별 타격이 없다고 한다.

1) 이처럼 “우리가 ‘인류세’라고 칭할 정도로 인류가 지구에 남기는 ‘발자국’이 그토록 거대한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점이 존재한다. 물론 인류세라는 용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② ‘정말로 시급한가?’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거나 그 방향성을 문제 삼는 이들도 많다. 넷플릭스의 유명한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는 우리의 방향성이 ‘왜곡’ 당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당해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는 사람은 환경주의・동물권을 옹호하는 사람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수산업과 환경단체가 결탁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가령 환경단체는 돈을 받고서 ‘돌핀 세이프’ 인증을 도와준다. 또 해양플라스틱 오염의 주범은 어업용 그물 때문임에도, 환경단체들은 이를 묵인하고 있다. 스타벅스에서 종이빨대로 바꾸는 것은 이 ‘거악’을 먼저 척결하지 않고서는 그 의미를 찾기가 힘든 실정이다.


또 셸런버거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당장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식량생산은 미래에 더 늘어난다. 이는 셸런버거의 주장이 아니라, 기후협약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연구보고서의 내용이다. 즉 기후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공신력이 있는 연구보고서들에서는 실제로 ‘지구 종말론’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책에는 이러한 종류의 ‘종말론적 환상’들이 수도 없이 나열되어 있다.



지구법학을 정당화하는 문제에는 모호한 면들이 많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토마스 베리’의 <자연물을 비롯한 지구 공동체 구성원의 권리 개념>6)이다. 강에게 지구권이 적용된다면, 강의 본성에 고유한 ‘흐를 권리’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의문이 든다. (i) ‘흐를 권리’가 강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물분자’가 될 권리는 강에게 없는가?


(ii) 본성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과연 우리는 ‘타자’의 본성을 우리의 잣대로 확정지을 수 있는가? 물론 이 의문은 밑도 끝도 없는 회의론자의 질문으로 들리기도 한다. 특히 본성에 관한 문제는 플라톤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위 질문은 보다 실용적인 지점이 동시에 존재한다. 무엇을 ‘권리’로 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것을 기준으로 얘기해야 하는가? 우리가 사육당하는 돼지를 고통 없이 죽이고서 맛있는 돼지고기로 활용할 때, 그 ‘돼지’의 권리와 본성은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질문이 너무나도 냉정하게 느껴진다면, 다음과 같은 한계 상황을 상상해보면 좀 더 쉬울 수 있다. “만약 굶주림에 처해 있는 기아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고통 없이 돼지를 죽이고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한 사람의 ‘권리’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의 권리와 동물의 권리가 경합할 때, 즉 미래에 ‘동물권’이 보편・타당하게 인정될 때 우리는 어떠한 권리를 우선할 수 있는가? 당연히 인간의 생명권이 동물의 생명보다 우선할 것이겠지만, 우선은 동물의 권리를 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실존적 한계상황’을 고려하지 않기 힘들다. 만약 우리가 한계에 처해 있을 때 조차도 동물권을 지켜야만 하는 근본적인 당위성이 ‘동물권’이라는 단어에 함축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맞는 윤리를 구해야 하는가? 이 부분에서는 ‘윤리학’ 내지는 ‘메타윤리학’이라는 주제로 넘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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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난 뒤, 알 수 없는 갑갑함이 남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목적은 문제를 제기하기 위함이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이번 독서를 통해 현 시대 학문의 최전선에서 논의되는 개념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는 점이 큰 수확이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는 동안 그 밖의 세상은 많이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 담론이 어디까지 우리의 세계를 확장시켜 줄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타당하게 다가올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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