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2.10.01 하버마스 4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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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분량: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5p) 까지

장소: 신촌 모아 스터디룸

발제자: 정석훈, 문수빈


1부 (10:30-12:30) : 8기 프로필 촬영 (시현하다)

점심 (12:30-13:30)

2부 (13:30-14:30) :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다섯째 강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 정석훈

3부(15:40-16:40) :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여섯째 강의 '하이데거' / 문수빈



1부


하버마스 4차 모임 1부는 8기 프로필 촬영으로 시작했습니다. 시현하다에서 촬영을 진행했으며 보시다시피 다들 만족스러운 프로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프로필은 Society 451 브로셔, 명함 등에 사용될 예정입니다. 


다들 20대의 기록을 451에서 남기게 되었네요. 자랑하고 사랑합니다.


2부



2부는 신촌 모아 스터디룸에서 정석훈 회원의 발제로 시작했습니다. 다섯째 강의 파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부정 변증법', 그리고 '도구적 이성 비판' 이론을 소개하고 평가하는 내용이 중심이었습니다. 하버마스는 중간에 지난 주 강의였던 니체의 이론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이성 개념을 다룰 때 니체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도 비교해줍니다. 나아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두 사람의 비판 이론이 마르크스주의의 개념 틀을 차용했다는 점도 명시하며 어떻게 그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을 아포리아 상태로 이끌어 가는지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버마스의 주장은... 이 책에 소개된 모든 학자들이 틀렸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책에서 계몽이 신화와 같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신화적 세계관 내에서 사는 사람은 신화의 세계관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예를 들어서, 봄과 여름의 계절이 바뀌는 시기 불어오는 바람이 있다고 했을 때, 신화적 세계관에서는 그것이 매년 반복되는 운명적인 사건으로 서술되고 신화라는 세계관 안에서 현상을 해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관 내에서 사는 사람은 신화 자체에 매몰됨으로써 비판이 자리잡을 틈이 없다는 말입니다.


계몽도 똑같습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 이라는 세계관 안에서 우리들은 설명되지 못하는 것들을 소거시켜버립니다. 이성적이지 않은 말을 한다던지, 합리적으로 무엇인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정되어야 할 것이지요. 이러한 현상은 윤리와 도덕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하는 근본 원인을 우리는 이성과 합리성의 토대 위에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크 모노가 말하듯 물활론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이성의 세계에선 물활론의 세계가 설명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합리적인 것으로부터, 오랜 기간 종교적 세계로부터 넘어온 규범 윤리 따위는 과학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크 모노도 기존 규범 윤리를 불합리한 것으로 파악해 물활론의 규범들을 무효 선언합니다. 생물학이라는 과학 위에서 지식의 윤리를 다시 쌓자는 주장이었죠. 아무튼,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런식으로 계몽은 신화고 신화는 곧 계몽이라 주장합니다. 계몽이 신화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도르노는 총체성을 거부하며 '부정의 변증법'을 말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마지막 부분만을 떼어내고 남긴 이론입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즉자-대자-즉자라는 자기보존의 운동을 하면서 마지막엔 절대정신의 실현이라는 통합으로 나아가는 이론인데, 아도르노는 마지막에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된다는 점을 거부하며 우리는 대상의 다양한 측면만을 더듬을 수 있을 뿐 하나의 개념으로 그것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A가 맞을까? B가 맞을까? C가 맞을까? ... 라는 무한의 변증만을 남겨두었습니다. 


하나 더 짚을 것은 '도구적 이성' 비판입니다. 말 그대로 이성이 도구화되어 비판이 자리잡지 못하는 것을 지적합니다. 위에서 계몽의 변증법 설명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이 자리잡지 못하는 이성을 비판합니다.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이름 하에 잘려져 나가는 세계의 풍부함을 보라는 말이었지요.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현대인은 도구적 이성 사용과 계몽의 세계관이라는 믿음 하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고 이해하고 설명하는 능력을 스스로 잃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를 풍부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버리는 것. 그것이 현대인을 지배하는 세계관입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이러한 비판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의 구조 내에서 설명합니다. 지난 번 진행했던 마르크스 파트의 '소외된 노동' 개념을 상기해보겠습니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은 이 세상을 이롭게하고 인간의 자기실현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노동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었지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여기에 노동 대신 대중문화라는 키워드를 넣습니다. 즉, 이들이 보기에 세계를 더 이롭게 하는 것이 이성인데, 대중문화(이성 신봉, 도구적 이성)는 그 기능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니체와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니체는 가치 판단을 취미판단의 영역으로 밀어버리고 타당성과 비타당성을 긍정적 가치판단과 부정적 가치판단으로 환원시켰습니다. 다시 말해 니체는 타당성 주장을 선호체계로 재해석하면서, 가치판단들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에 상호주관적 타당성의 주장과 결합될 수 없다는 명제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에 대한 회의로 인해 서로 다른 주체들이 이성적으로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했던 것입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니체와 달리 이성을 긍정합니다. 다만, 도구적 이성은 시대적 흐름이기 때문에 막을 수 없지만 도구적 이성이 되는 순간 만큼은 짚어낼 수 있으니 그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자고 헀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니체는 이성을 회의한 데 비해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는 이성을 긍정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강의의 대략적인 틀이었습니다.


3부



3 부는 문수빈 회원의 하이데거 발제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이데거 파트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버마스는 근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떠한 반근대적이거나 탈근대적인 출구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여섯째 강의에서 하이데거 존재론의 사상적 기원을 해부하고, 그의 개념을 주체철학과의 연관 속에 해석하며 독창성과 한계를 밝히는 작업을 진행한다. 여섯째 강의의 핵심은 ‘하이데거는 주체철학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났는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추종하면서도 서양 형이상학의 내재적 파괴를 통해서 자기관계적 이성비판에서 오는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하버마스는 그 과정을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사건(허무주의의 도래와 극복)을 예술적으로 재생된 신화론의 무대로부터 철학의 무대로 옮겨놓으려는 시도로 파악했다. 이번 장에서 그는 하이데거가 디오니소스적 메시아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음의 4단계로 고찰한다.



1단계

하이데거는 청년헤겔파의 비판을 통해 박탈되었던 지배적 지위를 다시 철학에 부여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운명은 세계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전이해(슐라이어마허, 이미 갖고 있는 이해 범주)를 통해 확정되는데, 존재이해의 역사는 형이상학의 역사 안에서 명료하게 표현된다. 즉, 하이데거가 문제 삼는 존재자 해석의 키를 쥐고 있는 형이상학의 지위가 상승하는 것.


2단계

하이데거는 관념론적 관점을 바탕으로 현대성을 비판한다. 그가 바라보는 근대 이후의 세계는 성스러움이 존재하지 않는 궁핍한 세계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기술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자원이나 수단으로 간주된다. 또한 근대적 주관주의는 인간을 존재자의 바탕에 놓여있는 주체로 설정함으로써 존재자 전체를 표상된 객체의 주관적 세계로 변화시킨다. 이에 하버마스는 하이데거가 주체중심적 이성의 권위적인 측면만을 바라봤다고 비판한다.



3단계

하이데거는 현대의... 서양 역사의... 그리고 형이상학의... 완성(종말이자 다른 시작)의 개념을 낭만주의 모델로부터 차용한다. 그는 서양의 역사를 규정해온 표상행위를 통한 존재이해(눈앞의 존재)를 파생적인 것으로 보고, 단지 존재자의 존재로서 이해 되었던 존재를 존재자로부터 분리시킨다. 니체 사상에서 디오니소스가 그러했듯, 하이데거 사상에서는 이 존재(존재자가 자신을 열어 보이면서 우리에게 다가옴)가 도래하는 메시아의 역할을 한다. 존재자를 이론적인 파악 대상으로 간주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현대의 총체적 존재 망각으로 근원적 의미의 존재는 멀어졌기 때문이다.


4단계

하이데거는 근대적 주체성의 유물인 자기반성(형이상학 역사의 파괴와 극복) 대신 상호주관적으로 성취한 합의(상호이해)를 강조한다. 그러나 하버마스에게 하이데거의 이런 생각을 주체철학에 의해 바탕이 마련된 연구들의 방향과 유사한 것으로 보며, 그가 주체철학이 모든 담론적 사유를 배제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하버마스는  하이데거가 주체철학이 후설 현상학의 형태로서 전수해 준 문제설정에 여전히 묶여있으므로 현대성의 담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저자는 하이데거 철학으로부터 세 가지 필연적 실패를 읽어낸다. 그리고  기초존재론에 이르는 하이데거의 작업과정을 세 단계로 소개한다. (다음은 하이데거 철학 개념의 간략한 뜻풀이이다. ‘현존재’는 자신이 존재함에 있어 이 존재 자체가 문제되는 존재자, 즉 인간이다. ‘세계-내-존재’는 현존재가 지니는 본질적 구조로, 모든 존재자가 각자의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세계 그 속에서 인간이 초월하여 있는 것이다.)


*후설 현상학의 목표는 어떠한 전제나 기준 없이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상학은 실제적인 내용을 가진 분과 학문이 아니라 학문들이 지식 추구를 위해 따라야 하는 방법론적 성격을 가진다. 다시 말해 의식의 지향성이 탐구 대상이 된다. 의식은 늘  ~에 대한 인식이므로, 대상은 우리 의식에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대상인 것이다.


이는 근대철학의 핵심 메시지라 할 수 있는 '파악'의 기제와는 다르다. 데카르트는 의식을 그 자체 고립된 채로 있는 실재로서 다루고 있었고 대상을 수리물리학적 방식을 통해 보편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실재성이 의심스러운 외부 대상들과 존재함의 확실성이 확보된 의식을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데카르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후설은 위와 같은 접근 방식을 돌파하려 현상학을 주장하게 되는데, 현상학은 학문을 부정한다. 근본적인 경험의 다양성을 추상화하여 일면적인 인과 관계로 현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식의 작업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 즉, 현상학에서 학적인 설명은 현상에 대한 이차적 진술일 뿐이다. 후설은 이렇게 발견된 의식이 대상을 구성하는 활동이기까지 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여전히 데카르트적 전통 안에 있는 것이며, 대상 구성의 역할을 하는 의식의 활동을 밝히되 추상적인 차원에 머무르며 그 작업을 수행한 칸트의 작업을 가장 구체적인 경험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쇄신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스피노자이다. 스피노자의 입장에서 의식은 ~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단계들을 거치며 주-객-연관의 패러다임적 의미를 박탈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실존범주의 일반성과 구체성 사이의 구별이 모호해졌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또 자기반성 대신 존재이해의 방법으로 초월철학이 강화되었다고 평가한다. 이 진리개념 이후 하이데거는 기초존재론의 또 다른 핵심개념인 “세계”를도입한다. 여기서 저자는 하이데거가 현존재를 다시 초월적 주체성의 자리로 환원시켰다고 본다.



현존재의 분석은 존재자에 대한 관계맺음을 인식관계의 모델에 따라 파악하는 후설적 현상학의 건축술을 따른다. 그런데 이러한 건축술에는 초월적 인식조건들을 넘어서는 방법을 통해 대상영역을 구성하는 주체를 위한 자리가 필연적으로 생기게 된다.


후기 하이데거는 역사를 존재 자체가 각 시대를 규정하는 근본기분을 통해서 시대마다 다르게 개시하는 사건으로 간주한다. (가령, 고대 그리스의 근본기분은 경이이며 현대기술문명의 근본기분은 경악이다.) 하버마스는 이를 두고 존재의 역사화와 더불어 명제적 진리의 토대박탈과 담론적 사유의 평가절하가 일어났다고 서술한다. 하버마스는 하이데거가 시간화된 근원철학을 온전히 해명하지 못한 채 공허한 존재의 진리를 내세우게 된 것으로 본다.



이번 장에서 하버마스는 파시즘이 하이데거의 이론 발전에 끼친 영향을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 취임 직후 몇 개월간 나치에 부역한다. 그 이후로 그는 현존재라는 개념을 개인적 실존 대신 민족의 집단적 현존재로 대체한다. 그 결과 그의 철학과 시대사적 사건들 사이에 내면적 상관관계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언급하지 않지만, 하이데거는 1938년부터는 나치즘을 ‘모든 존재자를 계산 가능한 에너지로 전락시키는 기술적 전체주의’의 극단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하버마스는 하이데거가 주체철학적 사유모형의 단순한 전도를 주장함으로써 결국 주체철학이 안고 있는 문제설정에 묶여 있다고 결론내린다.



이렇게 다섯째, 여섯째 강의도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몇 번만 더 하면 책을 완독하게 됩니다. 우리가 공부한 철학적 담론을 현실에서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기획을 할 때 기획의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그 기획에 왜 필요한지 철학적으로 규명할 줄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겠지요. 철학은 본질을 캐어 묻는 작업인 바, 그 질문을 쫓아가는 과정에서 얻게되는 여러가지 지식의 가지들이 여러분들의 말과 행동에 신뢰가 되어줄 것입니다.


독서에 지각생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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