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JOKER
DIRECTOR · WRITER: Todd Phillips
BOOK / MOVIE / ETC: MOVIE
SCORE ★★★★★
REVIEW:
'Put on a happy face.'
0. 액션 장르 ver. 조커

"Why So Serious?" _ Joker ( in <Dark Knight> )
2008년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 나이트>에 나오는 조커를 기억하시는가? 지금은 고인이 된 히스 레져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에서의 조커는 한마디로 신박한 미친놈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그야말로 이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악당, 혼란을 추구하는 광기 그리고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인물성 등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해석으로 분석되었으며 그만큼 히스 레져의 조커 열풍은 그 시절에 뜨거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크 나이트>를 엄청 재밌게 보지는 않았다. 하비 덴트가 동전 던지는 건 뭐 상징적이다는 점에선 좋았지만 매번 던지니 꽤나 지루했었고 - 비록 후딱 던지긴 했지만 - 표면적으론 악당으로 살아가는 배트맨에 대해서도 별로 동정심이 들지 않았고 - 브루스 웨인은 세계 최고의 부자인데다 거의 모든 면에서 부족할 것 없이 살아가지 않는가? - 그러한 비극에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히스 레져의 신들린 연기와 그를 이루는 연출은 정말 인상 깊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다크 나이트>에 7점을 주었는데 히스 레져의 조커가 없었으면 내가 준 평점은 6점이나 그 밑이 였을 것이다. 그만큼 조커에 대한 캐릭터성은 탁월했다. 하지만 이런 조커에게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바로 동기에 대한 공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왜 조커는 또라이 짓을 하고 다니는가? 왜 얘는 굳이 할 일 없이 배트맨과 고담 시민들을 괴롭히고 다니는가? 이 자의 인생 목적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막 떠오르는 데 영화가 내게 준 - 사실 내가 그렇게 느낀 - 충격적인 답은 '그딴 이유는 우리 조커에게 없어!' 였다. 조커가 또라이인 가장 큰 이유는 행동에 동기와 제대로 된 이유의 부재이다. 혼란을 추구하는 광기를 가진 자 답게 존재 자체가 혼란이다. 물론 매력적인 설정이다.
배트맨의 적이지만 절대 배트맨을 죽이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의 뱃 속에 휴대폰 폭탄을 넣고 병원을 폭파시키고 배 두척을 인질로 잡는 등 상상조차 힘든 일들을 하면서 돈엔 관심이 없고 진정 무얼 원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매력보단 조커란 인물이 붕 떴다는 생각을 더 받았다. 영화에 나온 모든 인물들과 별개로 혼자 별천지에 사는 듯 하다. 오히려 액션장르에 걸맞는 그 남다른 스케일과 초월적인 태도, 큰 그림을 그리는 명석함은 무슨 영웅을 보는 듯 했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여운은 결코 없었다.
1. 코미디 장르 ver. 조커

'Don't forget to smile!'
그런 아쉬움을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조커가 대신 충족해주었다.
사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다크 나이트>의 조커처럼 처음부터 조커가 아니다. 애초에 예명도 처음엔 '카니발'이었다. 본명은 아서 플렉. 정신병질환 환자다. 흔히 말하는 사회의 약자인 것이다.
내가 <마더> 리뷰에서 '강한 광기는 약한 자에게서 나온다'라고 하였다. 그 리뷰를 쓰고 봐서인지 그 말이 계속 떠올랐는데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서 다행히 '아 내가 아주 개소리를 한 건 아니구나' 싶었다.
'I just hope my death makes more cents than my life.'
우리의 불쌍한 아서는 말 그대로 정말 불쌍하다. 일단 아버지가 없다. 미국 가신게 아니라 아서는 애초에 아버지란 존제에 대해 기억이 없는 듯 하다. 그리고 노모를 부양하고 살아간다. 그것도 가난하게. 그나마 있던 직장도 본인 실수로 작중에서 해고당한다. 그 외에도 많은 일을 당하는데 영화를 보면서 아서에게 동정심을 주지않은 사람이 있을지 궁금하다. 적어도 가만히 있다가 깡패한테 린치당한건 정말 불쌍하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 소시민 아서는 '흑화'했다. 엄마를 제외한 모든 살인이 충종적이었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막 살인을 저지르고 길빵하고 본인 표현으로 나쁜짓들 많이하고 다녔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과 하비 덴트를 타락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조커>는 아서 본인만이 타락당하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담았다.
근데 솔직히 그런 아서를 진정 이해할 수 있으신가?
영화는 전적으로 아서에게 감정이입할 것을 요구한다.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호아킨 피닉스의 신들린 연기는 거진 협박이었다. '이런 내 모습을 봐도 내가 안불쌍해? 솔직히 내가 얘들 죽일만 하지 않았냐?'라고 막 주입하는 것 같았다.
어, 근데 안 불쌍해.
물론 나도 감정이입은 잘 되었다. 특히 머레이에게 총격을 가할 때 전해지는 조커의 여유롭지만 불안한 감정은 가히 내가 본 영화 장면 중 최고의 장면이라 할 수 있었다. 영화 내내 아서의 감정을 잘 나타내었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행동은 관객들을 충분히 이해시키고도 남았다. 관객들은 아마 조커의 광기어린 모습을 보면서도 묘한 공감을 느껴 자신도 미쳐버린 것인지 혼란이 왔을 것이다. 이는 참으로 대단했다. 관객을 시위에 나서는 고담 시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모두 조커를 이해하고 열광하게 만들었다.
어, 근데 안 불쌍하다.
사실 미친놈을 상식선에서 받아들이고 평가하는 것도 할 일 없는 짓이다. 아마 이미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가?
'그래, 나도 살인이 정당화 안되는 거 알아! 나도 조커가 선 넘은거 안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궁예다. 내가 말하려던 것이 이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목조목 따져보자. 아서는 일단 자신의 실수로 일자리에서 짤렸다. 그리고는 돼먹지도 않은 거짓말을 했다. 게다가 옆집 여자에겐 무슨 스토커 행각에 무단침입까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서가 조커가 된 것은 사회가 혹은 세상이 만든 것보다 아서 스스로의 선택이 더 컸다. 어쨌든 지하철에서 총을 쏜 것은 아서의 선택이다. 그것도 확실하게 쫓아가 죽이기까지. 다 죽이고 나서는 그 감정을 주체못하고 춤을 춤으로써 희열을 승화시켰다.
아, 나도 아서가 궃을 일들을 당한 것은 안다. 갑자기 깡패한테 맞지 않나, 존경하던 코미디언에게 전국적으로 조롱을 당하지 않나, 아버지 인줄 알았던 사람은 찾아가니 자신의 어머니를 모욕하고 폭력까지 행사하니. 결정적으로 자신의 인생에 거의 전부이던 어머니를 부정당함으로써 '아서 플렉'이라는 자아마저 흐릿해져 갔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짜 무슨 보헤미안 랩소디의 가사처럼 '불쌍한 아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해버렸어... 오, 마마!' 이러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난 이 영화를 그렇게 극찬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커>가 매력적인 이유는 애초에 아서가 미친놈이었기 때문이다.
미친놈이 안 미친척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미친대로 살아가기로 하는 영화
"That’s, right, Murray. I’m not political. I’m just trying to make people laugh." _ Arthur Fleck
이 자체가 코미디다. 그래서 장르도 코미디다.
인생이 비극? 정치적 의도? 풍자? 비판? 적어도 나는 이 영화에선 그런거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Okay, I’m waiting for the punchline." _ Murray Franklin
아서가 태동하는 본성을 억누르려고 발악하는 그 자체가 나에겐 하나의 슬랩스틱 코미디였다. 결국 빵!하고 터져버리니, 이 얼마나 화끈한 펀치라인인가?
2. 개같은 코미디 장르

"I was just thinking of a joke. You wouldn’t get it." _ Arthur Fleck
이 영화가 도대체 왜 코미디인지 모르겠다고 나에겐 굉장히 불쾌했거나 찝찝한 영화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내 말에 동의하거나.
어쨌든 내가 이 영화를 코미디라고 하는 것은 진짜 내가 영화를 보는 내내 많이 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코미디 장르와 달리 대놓고 웃을 수는 없더라. 남들 진지한데 초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웃긴데 맘대로 웃지도 못하는 '개같은 코미디 장르'라고 부르기로 했다.
"I do. And I’m tired of pretending it’s not. Comedy is subjective, Murray." _ Arthur Fleck
하지만 결국 대놓고 웃었다. 위 대사가 나온 시점부터는 말이다. 그래, 맞다. 어쨌든 코미디는 주관적이니깐.
사실 저 대사는 나보다 영화에 나오는 아서에게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 내 생각엔 저 대사가 이 영화의 핵심 대사이다. 더 이상 참지 않고 여태까지 쌓아 올렸던 사회적인 가치를 모두 내려놓을 것이라고 아서 본인의 입으로 확언한 것이다.
계단은 <조커>에서 상징적이다. 아서는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 갈때 마다 아주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마지못해 올라간다. 게다가 주변에 널부러진 쓰레기나 우중충한 날씨는 더욱 그의 고단한 삶을 강조한다. 마치 깨진 유리창 효과라도 노리면서 아서를 충동질 하는 마냥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모습에 긍정적인 요소라고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분장을 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아서의 모습이 기억나는가? 얼마나 경쾌하고 신나보이던지, 보는 나까지 흥겨울 정도였다. 그 모습은 그전까지 볼 수없었던 자신감 넘치고 활기를 띄는 모습이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강렬한 희열은 준다. 당장 자신이 모든 굴례를 벗어놓고 살아간다고 상상해 보아라. 해방감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렇게 행동해보자. 못하겠다고? 당연하다. 당신은 아서처럼 미치지 않았으니까!
올라가고 쌓는 것은 무지하게 어렵다. 하지만 내려가고 그것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리고 마치 도미노처럼 그것은 엄청난 희열을 가져다 준다.
"I used to think that my life was a tragedy. But now I realize, it was a fucking comedy." _ Arthur Fleck
아서 조차 이 영화의 장르를 늦게 깨달았다. 자신의 역할을 계속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면서 모든 사회적 핍박을 견뎌내고 어찌했든 정상을 향해가는 비극적인 캐릭터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그의 역할은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힘차게 계단을 내려가는 코미디언인데 말이다.
"I haven’t been happy one day out of my entire fucking life." _ Arthur Fleck
코미디언이 비극의 주인공을 연기하는데 어떻게 행복하겠는가.
그에게 코미디란 그의 삶이며, 본성이며 행복이었다.
3. 웃음/광기

"All I have are negative thoughts." _ Arthur Fleck
장르를 늦게 깨달은 것과는 별개로 아서는 영화 내내 웃는다.
아핳ㅎ핳ㅎ하하핳하하하핳ㅎㅎ하하핳하하헿핳하하하핳하하하핳ㅎ하ㅏ하핳하하하하하
진짜 많이 웃는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실제로 웃는 것은 아니다. 병 때문에 웃는건데 어쨌든 진짜 많이 웃기는 한다.
이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흑화 전, 흑화 후.
흑화 전 아서는 말그대로 너무 웃어서 역설적으로 웃을 수 없다. 전반부의 아서는 부정적인 상황이나 생각을 가질 때 병적으로 웃는다. 그는 남들을 웃게해주고 싶어하지만 머레이의 말대로 정작 자기만 웃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아서 또한 웃고 있는 것이 아니니 전반부에서는 웃고 있는 사람이 없다.
흑화 후 아서는 마침내 웃고 싶을 때 웃는다. 병이 치료된건가 싶을 정도로 이제 자유자제로 웃는다. 모든걸 내려놓아 달관한 것이다.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이 없어진게다.
그렇다면 관객은 언제 웃을까? 고담 시민은 또 언제 웃을까? 적어도 영화는 아서가 웃을 때 어떻게든 그들이 웃지 못하게 장치해놨다. 폭력적인 장면을 넣어서라도 말이다. 이는 아서를 더욱 미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을 웃기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만을 웃기기로 한 것이다.
아서가 끝내 웃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 뿐이었다.
갑자기 동정심이 드는 것이냐고? 아니다. 내 말은 그래서 아서가 미친놈이란 것이다.
흑화 후, 아서 웃기기 프로젝트는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한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추구하는 광기로 인한 결과가 혼란이었다면 <조커>의 조커는 혼란이 한낱 부차적인 과정에 불구하다. 아서가 추구하는 광기는 단순하게 웃음을 위한 광기이다. 그는 그저 재밌고 웃기면 그만일 뿐, 그 외에 것엔 관심이 없다. 이 얼마나 순수한 코미디언인가.
4. 평점 10점 영화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_ <올드 보이>
극장가서 2번 봤다. 그리고 평점 10점을 주었다.
1회차 땐 아까 말했던 대로 끆끆대면서 봤다. 진짜 차마 못 웃겠더라. 옆에 아티스트처럼 생긴 민머리 아저씨가 너무 진지하게 보는데 부담이 느껴졌다.
2회차 땐 좀 더 편안하게 봤다. 봤던거 또 보는거라 처음 볼 때처럼 그렇게 웃기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전보다는 편하게 웃으면서 봤다. 어쩄든 코미디 장르 영화니까.
올해는 고맙게도 정말 재밌는 영화가 많이 개봉했다. <엔드 게임>, <기생충> 그리고 <미성년> 등. 그 중에서 <조커>는 나에게 최고였고 앞으로도 이 같은 울림을 주는 영화가 얼마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조커>가 나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거나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준 영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크 나이트>가 그런 점에서 나았다. 하지만 영화는 일단 재밌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조커>는 참으로 수작이다.
여담으로 그나마 영화를 통해 얻은 교훈을 얘기하겠다. 2회차를 보고 오는 길에 한국의 조커 3명을 만났다. 술 먹고 엄청 취해 길빵을 하면서 가는데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조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옆을 지나가면서 비꼬는 조크를 몇개 해주었더니 각자의 길을 한 30초 씩 걸었을 까 갑자기 뒤에서 성을 내며 지르는 소리와 옆에서 죄송하다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그때 문득 드는 생각이 일반적인 우리와 아서의 차이가 떠올랐다. 아서는 말그대로 구멍을 안 뚫어 놓고 철 냄비를 펄펄 끓이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았다. 그래서 불운하게도 터져버린 것이다.
아서처럼 쌓아 놓은채 살지 말자. 풀땐 좀 풀어줘야 한다.
글을 쓰다보니 엄청 길어졌다. 근데 이것도 꽤나 줄인 것이다.
긴 글 읽어주어 감사하다.
TITLE: JOKER
DIRECTOR · WRITER: Todd Phillips
BOOK / MOVIE / ETC: MOVIE
SCORE ★★★★★
REVIEW:
0. 액션 장르 ver. 조커
2008년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 나이트>에 나오는 조커를 기억하시는가? 지금은 고인이 된 히스 레져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에서의 조커는 한마디로 신박한 미친놈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그야말로 이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악당, 혼란을 추구하는 광기 그리고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인물성 등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해석으로 분석되었으며 그만큼 히스 레져의 조커 열풍은 그 시절에 뜨거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크 나이트>를 엄청 재밌게 보지는 않았다. 하비 덴트가 동전 던지는 건 뭐 상징적이다는 점에선 좋았지만 매번 던지니 꽤나 지루했었고 - 비록 후딱 던지긴 했지만 - 표면적으론 악당으로 살아가는 배트맨에 대해서도 별로 동정심이 들지 않았고 - 브루스 웨인은 세계 최고의 부자인데다 거의 모든 면에서 부족할 것 없이 살아가지 않는가? - 그러한 비극에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히스 레져의 신들린 연기와 그를 이루는 연출은 정말 인상 깊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다크 나이트>에 7점을 주었는데 히스 레져의 조커가 없었으면 내가 준 평점은 6점이나 그 밑이 였을 것이다. 그만큼 조커에 대한 캐릭터성은 탁월했다. 하지만 이런 조커에게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바로 동기에 대한 공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왜 조커는 또라이 짓을 하고 다니는가? 왜 얘는 굳이 할 일 없이 배트맨과 고담 시민들을 괴롭히고 다니는가? 이 자의 인생 목적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막 떠오르는 데 영화가 내게 준 - 사실 내가 그렇게 느낀 - 충격적인 답은 '그딴 이유는 우리 조커에게 없어!' 였다. 조커가 또라이인 가장 큰 이유는 행동에 동기와 제대로 된 이유의 부재이다. 혼란을 추구하는 광기를 가진 자 답게 존재 자체가 혼란이다. 물론 매력적인 설정이다.
배트맨의 적이지만 절대 배트맨을 죽이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의 뱃 속에 휴대폰 폭탄을 넣고 병원을 폭파시키고 배 두척을 인질로 잡는 등 상상조차 힘든 일들을 하면서 돈엔 관심이 없고 진정 무얼 원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매력보단 조커란 인물이 붕 떴다는 생각을 더 받았다. 영화에 나온 모든 인물들과 별개로 혼자 별천지에 사는 듯 하다. 오히려 액션장르에 걸맞는 그 남다른 스케일과 초월적인 태도, 큰 그림을 그리는 명석함은 무슨 영웅을 보는 듯 했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여운은 결코 없었다.
1. 코미디 장르 ver. 조커
그런 아쉬움을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조커가 대신 충족해주었다.
사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다크 나이트>의 조커처럼 처음부터 조커가 아니다. 애초에 예명도 처음엔 '카니발'이었다. 본명은 아서 플렉. 정신병질환 환자다. 흔히 말하는 사회의 약자인 것이다.
내가 <마더> 리뷰에서 '강한 광기는 약한 자에게서 나온다'라고 하였다. 그 리뷰를 쓰고 봐서인지 그 말이 계속 떠올랐는데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서 다행히 '아 내가 아주 개소리를 한 건 아니구나' 싶었다.
우리의 불쌍한 아서는 말 그대로 정말 불쌍하다. 일단 아버지가 없다. 미국 가신게 아니라 아서는 애초에 아버지란 존제에 대해 기억이 없는 듯 하다. 그리고 노모를 부양하고 살아간다. 그것도 가난하게. 그나마 있던 직장도 본인 실수로 작중에서 해고당한다. 그 외에도 많은 일을 당하는데 영화를 보면서 아서에게 동정심을 주지않은 사람이 있을지 궁금하다. 적어도 가만히 있다가 깡패한테 린치당한건 정말 불쌍하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 소시민 아서는 '흑화'했다. 엄마를 제외한 모든 살인이 충종적이었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막 살인을 저지르고 길빵하고 본인 표현으로 나쁜짓들 많이하고 다녔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과 하비 덴트를 타락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조커>는 아서 본인만이 타락당하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담았다.
근데 솔직히 그런 아서를 진정 이해할 수 있으신가?
영화는 전적으로 아서에게 감정이입할 것을 요구한다.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호아킨 피닉스의 신들린 연기는 거진 협박이었다. '이런 내 모습을 봐도 내가 안불쌍해? 솔직히 내가 얘들 죽일만 하지 않았냐?'라고 막 주입하는 것 같았다.
어, 근데 안 불쌍해.
물론 나도 감정이입은 잘 되었다. 특히 머레이에게 총격을 가할 때 전해지는 조커의 여유롭지만 불안한 감정은 가히 내가 본 영화 장면 중 최고의 장면이라 할 수 있었다. 영화 내내 아서의 감정을 잘 나타내었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행동은 관객들을 충분히 이해시키고도 남았다. 관객들은 아마 조커의 광기어린 모습을 보면서도 묘한 공감을 느껴 자신도 미쳐버린 것인지 혼란이 왔을 것이다. 이는 참으로 대단했다. 관객을 시위에 나서는 고담 시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모두 조커를 이해하고 열광하게 만들었다.
어, 근데 안 불쌍하다.
사실 미친놈을 상식선에서 받아들이고 평가하는 것도 할 일 없는 짓이다. 아마 이미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가?
'그래, 나도 살인이 정당화 안되는 거 알아! 나도 조커가 선 넘은거 안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궁예다. 내가 말하려던 것이 이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목조목 따져보자. 아서는 일단 자신의 실수로 일자리에서 짤렸다. 그리고는 돼먹지도 않은 거짓말을 했다. 게다가 옆집 여자에겐 무슨 스토커 행각에 무단침입까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서가 조커가 된 것은 사회가 혹은 세상이 만든 것보다 아서 스스로의 선택이 더 컸다. 어쨌든 지하철에서 총을 쏜 것은 아서의 선택이다. 그것도 확실하게 쫓아가 죽이기까지. 다 죽이고 나서는 그 감정을 주체못하고 춤을 춤으로써 희열을 승화시켰다.
아, 나도 아서가 궃을 일들을 당한 것은 안다. 갑자기 깡패한테 맞지 않나, 존경하던 코미디언에게 전국적으로 조롱을 당하지 않나, 아버지 인줄 알았던 사람은 찾아가니 자신의 어머니를 모욕하고 폭력까지 행사하니. 결정적으로 자신의 인생에 거의 전부이던 어머니를 부정당함으로써 '아서 플렉'이라는 자아마저 흐릿해져 갔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짜 무슨 보헤미안 랩소디의 가사처럼 '불쌍한 아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해버렸어... 오, 마마!' 이러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난 이 영화를 그렇게 극찬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커>가 매력적인 이유는 애초에 아서가 미친놈이었기 때문이다.
미친놈이 안 미친척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미친대로 살아가기로 하는 영화
이 자체가 코미디다. 그래서 장르도 코미디다.
인생이 비극? 정치적 의도? 풍자? 비판? 적어도 나는 이 영화에선 그런거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아서가 태동하는 본성을 억누르려고 발악하는 그 자체가 나에겐 하나의 슬랩스틱 코미디였다. 결국 빵!하고 터져버리니, 이 얼마나 화끈한 펀치라인인가?
2. 개같은 코미디 장르
이 영화가 도대체 왜 코미디인지 모르겠다고 나에겐 굉장히 불쾌했거나 찝찝한 영화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내 말에 동의하거나.
어쨌든 내가 이 영화를 코미디라고 하는 것은 진짜 내가 영화를 보는 내내 많이 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코미디 장르와 달리 대놓고 웃을 수는 없더라. 남들 진지한데 초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웃긴데 맘대로 웃지도 못하는 '개같은 코미디 장르'라고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대놓고 웃었다. 위 대사가 나온 시점부터는 말이다. 그래, 맞다. 어쨌든 코미디는 주관적이니깐.
사실 저 대사는 나보다 영화에 나오는 아서에게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 내 생각엔 저 대사가 이 영화의 핵심 대사이다. 더 이상 참지 않고 여태까지 쌓아 올렸던 사회적인 가치를 모두 내려놓을 것이라고 아서 본인의 입으로 확언한 것이다.
계단은 <조커>에서 상징적이다. 아서는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 갈때 마다 아주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마지못해 올라간다. 게다가 주변에 널부러진 쓰레기나 우중충한 날씨는 더욱 그의 고단한 삶을 강조한다. 마치 깨진 유리창 효과라도 노리면서 아서를 충동질 하는 마냥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모습에 긍정적인 요소라고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분장을 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아서의 모습이 기억나는가? 얼마나 경쾌하고 신나보이던지, 보는 나까지 흥겨울 정도였다. 그 모습은 그전까지 볼 수없었던 자신감 넘치고 활기를 띄는 모습이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강렬한 희열은 준다. 당장 자신이 모든 굴례를 벗어놓고 살아간다고 상상해 보아라. 해방감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렇게 행동해보자. 못하겠다고? 당연하다. 당신은 아서처럼 미치지 않았으니까!
올라가고 쌓는 것은 무지하게 어렵다. 하지만 내려가고 그것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리고 마치 도미노처럼 그것은 엄청난 희열을 가져다 준다.
아서 조차 이 영화의 장르를 늦게 깨달았다. 자신의 역할을 계속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면서 모든 사회적 핍박을 견뎌내고 어찌했든 정상을 향해가는 비극적인 캐릭터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그의 역할은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힘차게 계단을 내려가는 코미디언인데 말이다.
코미디언이 비극의 주인공을 연기하는데 어떻게 행복하겠는가.
그에게 코미디란 그의 삶이며, 본성이며 행복이었다.
3. 웃음/광기
장르를 늦게 깨달은 것과는 별개로 아서는 영화 내내 웃는다.
아핳ㅎ핳ㅎ하하핳하하하핳ㅎㅎ하하핳하하헿핳하하하핳하하하핳ㅎ하ㅏ하핳하하하하하
진짜 많이 웃는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실제로 웃는 것은 아니다. 병 때문에 웃는건데 어쨌든 진짜 많이 웃기는 한다.
이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흑화 전, 흑화 후.
흑화 전 아서는 말그대로 너무 웃어서 역설적으로 웃을 수 없다. 전반부의 아서는 부정적인 상황이나 생각을 가질 때 병적으로 웃는다. 그는 남들을 웃게해주고 싶어하지만 머레이의 말대로 정작 자기만 웃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아서 또한 웃고 있는 것이 아니니 전반부에서는 웃고 있는 사람이 없다.
흑화 후 아서는 마침내 웃고 싶을 때 웃는다. 병이 치료된건가 싶을 정도로 이제 자유자제로 웃는다. 모든걸 내려놓아 달관한 것이다.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이 없어진게다.
그렇다면 관객은 언제 웃을까? 고담 시민은 또 언제 웃을까? 적어도 영화는 아서가 웃을 때 어떻게든 그들이 웃지 못하게 장치해놨다. 폭력적인 장면을 넣어서라도 말이다. 이는 아서를 더욱 미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을 웃기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만을 웃기기로 한 것이다.
아서가 끝내 웃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 뿐이었다.
갑자기 동정심이 드는 것이냐고? 아니다. 내 말은 그래서 아서가 미친놈이란 것이다.
흑화 후, 아서 웃기기 프로젝트는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한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추구하는 광기로 인한 결과가 혼란이었다면 <조커>의 조커는 혼란이 한낱 부차적인 과정에 불구하다. 아서가 추구하는 광기는 단순하게 웃음을 위한 광기이다. 그는 그저 재밌고 웃기면 그만일 뿐, 그 외에 것엔 관심이 없다. 이 얼마나 순수한 코미디언인가.
4. 평점 10점 영화
극장가서 2번 봤다. 그리고 평점 10점을 주었다.
1회차 땐 아까 말했던 대로 끆끆대면서 봤다. 진짜 차마 못 웃겠더라. 옆에 아티스트처럼 생긴 민머리 아저씨가 너무 진지하게 보는데 부담이 느껴졌다.
2회차 땐 좀 더 편안하게 봤다. 봤던거 또 보는거라 처음 볼 때처럼 그렇게 웃기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전보다는 편하게 웃으면서 봤다. 어쩄든 코미디 장르 영화니까.
올해는 고맙게도 정말 재밌는 영화가 많이 개봉했다. <엔드 게임>, <기생충> 그리고 <미성년> 등. 그 중에서 <조커>는 나에게 최고였고 앞으로도 이 같은 울림을 주는 영화가 얼마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조커>가 나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거나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준 영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크 나이트>가 그런 점에서 나았다. 하지만 영화는 일단 재밌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조커>는 참으로 수작이다.
여담으로 그나마 영화를 통해 얻은 교훈을 얘기하겠다. 2회차를 보고 오는 길에 한국의 조커 3명을 만났다. 술 먹고 엄청 취해 길빵을 하면서 가는데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조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옆을 지나가면서 비꼬는 조크를 몇개 해주었더니 각자의 길을 한 30초 씩 걸었을 까 갑자기 뒤에서 성을 내며 지르는 소리와 옆에서 죄송하다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그때 문득 드는 생각이 일반적인 우리와 아서의 차이가 떠올랐다. 아서는 말그대로 구멍을 안 뚫어 놓고 철 냄비를 펄펄 끓이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았다. 그래서 불운하게도 터져버린 것이다.
아서처럼 쌓아 놓은채 살지 말자. 풀땐 좀 풀어줘야 한다.
글을 쓰다보니 엄청 길어졌다. 근데 이것도 꽤나 줄인 것이다.
긴 글 읽어주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