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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회원2019-10-16 00:58
네 5줄 요약갑니다.
1. 셰이드는 시인.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를 씀. 셰이드는 죽고 여기에 그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킨보트가 주석을 담.
2. 주석을 달려고 하는데 혼자서 하려고 함. 그리고 다른 관계자들을 적으로 돌림. 무언가 수상함. 게다가 킨보트는 셰이드(둘다 노년)를 안지 수개월에 불과함. 의혹 증폭
4. 알고보니 킨보트는 과대망상적인 행동을 함. 지맘대로 해석하고 짝사랑하는 여고생처럼 셰이드의 행동 그리고 시를 과잉 해석함. 실제로 셰이드를 사랑함(동성애)
5. 더불어 자기가 젬블라라는 왕국의 왕이라고 주장. 그리고 셰이드가 자신의 왕국을 위해 시를 썼다고 쌉소리 시전. 셰이드의 죽음도 왕인 자신과 관련있다고 주장.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알지 못함.
*킨보트는 작가가 아니라 허구의 인물입니다. 작가는 나보코프입니다.
1. 셰이드는 시인.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를 씀. 셰이드는 죽고 여기에 그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킨보트가 주석을 담.
2. 주석을 달려고 하는데 혼자서 하려고 함. 그리고 다른 관계자들을 적으로 돌림. 무언가 수상함. 게다가 킨보트는 셰이드(둘다 노년)를 안지 수개월에 불과함. 의혹 증폭
4. 알고보니 킨보트는 과대망상적인 행동을 함. 지맘대로 해석하고 짝사랑하는 여고생처럼 셰이드의 행동 그리고 시를 과잉 해석함. 실제로 셰이드를 사랑함(동성애)
5. 더불어 자기가 젬블라라는 왕국의 왕이라고 주장. 그리고 셰이드가 자신의 왕국을 위해 시를 썼다고 쌉소리 시전. 셰이드의 죽음도 왕인 자신과 관련있다고 주장.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알지 못함.
*킨보트는 작가가 아니라 허구의 인물입니다. 작가는 나보코프입니다.
한국콘스탄틴2019-10-16 01:00
셰이드의 시를 두고 적어내려간 과대망상인가요?
문학동네 표지의 눈가린 이미지는 어떤 의미에서 사용된건가요??
진실은 알 수 없다는 암묵적 메시지인지
문학동네 표지의 눈가린 이미지는 어떤 의미에서 사용된건가요??
진실은 알 수 없다는 암묵적 메시지인지
탈퇴한 회원2019-10-16 01:09
@한국콘스탄틴
그 모든게 맞물려 하나의 게임처럼 작용하는 것 같아요. 마치 책을 읽는 제가 롤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 처럼 책을 읽고 주어진 조각들을 충실히 맞추고 있는 것이죠. 큐브 시리즈에서 큐브에 갇혀서 퀴즈 푸는 것 처럼요 ㅎㅅㅎ
한 번 읽은 저로서는 왕국이야기는 거부할 수 없어요. 너무 구체적이고 서사가 딱딱 맞으니까요. 그런데 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보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더군요!
진실은 알 수 없다는 메시지 일까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 메시지 어디선가 보면 알 수는 있겠지만 그 또한 다른 해석일 뿐이니까요. 더 순전히 파고들고 답을 찾고 싶어요!
확실히 창작자의 마음과 같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생전에 나보코프도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깊은 혹은 너무 멀리나간 해석들을 싫어했다고 해요. 롤리타가 하도 문제작이라 노이로제가 걸린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한 번 읽은 저로서는 왕국이야기는 거부할 수 없어요. 너무 구체적이고 서사가 딱딱 맞으니까요. 그런데 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보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더군요!
진실은 알 수 없다는 메시지 일까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 메시지 어디선가 보면 알 수는 있겠지만 그 또한 다른 해석일 뿐이니까요. 더 순전히 파고들고 답을 찾고 싶어요!
확실히 창작자의 마음과 같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생전에 나보코프도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깊은 혹은 너무 멀리나간 해석들을 싫어했다고 해요. 롤리타가 하도 문제작이라 노이로제가 걸린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한국콘스탄틴2019-10-16 01:19
@탈퇴한 회원
표지 그림을 찾아봤는데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네요.
Gabriel Isak 이라는 스웨덴 사진작가가 찍는 사진인데
고독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사진이래요.
저도 저렇게 눈을 가려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요.
세상에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하고.
책의 내용과는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을까요?
마케팅팀 인터뷰좀 해주세요 !!
Gabriel Isak 이라는 스웨덴 사진작가가 찍는 사진인데
고독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사진이래요.
저도 저렇게 눈을 가려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요.
세상에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하고.
책의 내용과는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을까요?
마케팅팀 인터뷰좀 해주세요 !!
탈퇴한 회원2019-10-16 01:25
@탈퇴한 회원
고독은 악마의 놀이터다. 나는 내 외로움과 비탄의 깊이를 설명할 수 없다._123p
고독은 이 책에서 킨보트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키워드이지만 내용설명에 걸리적거려서 뺐습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킨보트가 지독한 외로움에 과대망상을 한거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라 그런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 것같네요
고독은 이 책에서 킨보트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키워드이지만 내용설명에 걸리적거려서 뺐습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킨보트가 지독한 외로움에 과대망상을 한거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라 그런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 것같네요
한국콘스탄틴2019-10-16 01:13
방금 리뷰를 천천히 다시 읽었는데
책 자체가 카오스 상태라서 그런지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갑니다...
대신 어떤 책인지는 쉽게 써있어서 감은 잡혀요.
그러니까 <인생은 미완성된 시에 붙인 주석 같은 것> 이 자체를 소설로 풀어낸거고
그걸 표현하려다가 미쳐버린 소설의 결말을 과하게 열린결말로 마무리짓고
보통의 사실성과는 관계없는 특별한 것을 독자가 창조하게끔 하는,
완전히 작가를 죽여버리고 독자가 새로운 주석을 달아버리도록 하는 예술작품이라고 느껴집니다.
책 자체가 카오스 상태라서 그런지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갑니다...
대신 어떤 책인지는 쉽게 써있어서 감은 잡혀요.
그러니까 <인생은 미완성된 시에 붙인 주석 같은 것> 이 자체를 소설로 풀어낸거고
그걸 표현하려다가 미쳐버린 소설의 결말을 과하게 열린결말로 마무리짓고
보통의 사실성과는 관계없는 특별한 것을 독자가 창조하게끔 하는,
완전히 작가를 죽여버리고 독자가 새로운 주석을 달아버리도록 하는 예술작품이라고 느껴집니다.
익명2019-10-16 03:21
<롤리타>를 읽어봤었는데 책 구성이 특이하더군요. 책 전체가 주인공의 변론이라는 구성은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나보코프는 정말 천재인 것 같습니다. 보통 작가는 글로써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나타내지만 그는 구성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생각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롤리타>에서는 '변론'이라는 구성을 통해 '불완전한 사랑을 하는 자의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인정 욕구'를 나타내었던 것 같고 <창백한 불꽃>에서는 말씀하신대로 '인생의 미완성과 난해함'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영감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문학' 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어디서 본 재미있는 텍스트가 있습니다. 인물의 인상 착의를 설명하는 텍스트였는데
모자
귀 안경 귀
입
코트와 니트
작가는 이런 식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글을 적어 묘사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더욱 도발적인 문학도 창조 가능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책을 하나의 방으로 설정해 그 속에 사람 한명을 가둔다고 생각하는 거죠. 책의 인덱스는 방의 구조를 나열하여 글의 순서는 시간과 상관이 없고 단지 그 구조에 대한 인물의 행동이나 감정변화를 나타내는 겁니다. 이런 책들을 10권 정도 시리즈로 만든다면 그것들은 10명의 사람을 가둔 하나의 감옥이 되지 않을까요? 그들 간에 얽힌 사건들을 은연 중에 나타낸다면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도 같습니다.
적다보니 헛소리가 길어졌는데 어쨌든 보편적인 플롯이 파괴된 문학도 참 흥미로운 발상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도발적이고 생소한 구성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요.
나보코프는 정말 천재인 것 같습니다. 보통 작가는 글로써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나타내지만 그는 구성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생각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롤리타>에서는 '변론'이라는 구성을 통해 '불완전한 사랑을 하는 자의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인정 욕구'를 나타내었던 것 같고 <창백한 불꽃>에서는 말씀하신대로 '인생의 미완성과 난해함'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영감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문학' 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어디서 본 재미있는 텍스트가 있습니다. 인물의 인상 착의를 설명하는 텍스트였는데
모자
귀 안경 귀
입
코트와 니트
작가는 이런 식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글을 적어 묘사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더욱 도발적인 문학도 창조 가능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책을 하나의 방으로 설정해 그 속에 사람 한명을 가둔다고 생각하는 거죠. 책의 인덱스는 방의 구조를 나열하여 글의 순서는 시간과 상관이 없고 단지 그 구조에 대한 인물의 행동이나 감정변화를 나타내는 겁니다. 이런 책들을 10권 정도 시리즈로 만든다면 그것들은 10명의 사람을 가둔 하나의 감옥이 되지 않을까요? 그들 간에 얽힌 사건들을 은연 중에 나타낸다면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도 같습니다.
적다보니 헛소리가 길어졌는데 어쨌든 보편적인 플롯이 파괴된 문학도 참 흥미로운 발상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도발적이고 생소한 구성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요.
탈퇴한 회원2019-10-16 13:28
맞아요. 그리고 창백한 불꽃을 쓰게 된 배경경험이 실제로 나보코프가 푸시킨의 시에 주석작업을 했을 때라고 합니다. 그런 경험을 시로 구성한 것은 말씀하신 이야기들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파일럿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비행기의 속도 고도 등의 보고와 뭐,, 관제탑과 주고받은 신호만 나열해서 어떤 상황을 꾸며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참 짜릿하네요. 누가 써주면 좋겠어요. 저같은 경우는 신문 하나를 만들면서 그 자체가 완전한 신문이면서 소설이기도 한... 뭐...네
그리고 당시 푸시킨 시에 대한 나보코프의 주석에는 킨보트처럼 선을 넘을듯말듯한 부분들이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독자나 평론가들이 '저샛기 멍청이 아니야?'라는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꽤 거센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창백한 불꽃이 출간됐고.... 바보같은 주석자를 스스로 연기한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죠. 현실에서 킨보트를 연기한 거. 나보코프는 그냥 모든게 장난(?)이었던 것 같아요. 유희. 즐거움. 게임 등등...
나보코프는 실제로도 추리 게임이나 체스 그리고 퍼즐 등 머리쓰는 싸움을 즐겼다고 해요. 재능도 있고요. 그는 소설 자체도 그렇게 여긴 듯 해요. 증거로 그는 본인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딱히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언급했어요. 그냥 도구죠. 그리고 소설을 현실을 반영하고 교훈을 이끌어내는 도구가 아니라 '언어'의 극단에서 줄타기를 하는 언어유희 게임이라더군요. 그래서 과한 해석을 싫어한다고 해요. 사전을 펴놓고 글을 쓰고, 실제 사람보다는 lolita라는 소리에 영감을 얻었을 정도라네요. 그래서 첫 구절에 그 앞니를 두드리는 세음절 롤리타!(맞나?) 라고 말 한 것 같아요.
오래전이지만 롤리타를 보면도 잉?잉?엥?옹?어어? 하면서 소설의 끝에 이르렀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 책과 비슷하네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뤘을 때 회원들이 밀란쿤데라 책을 시리즈로 읽자고 이야기했었는데 그런 욕구를 지금 나보코프에게 강력하게 느낍니다!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포함한 다른 작품을 읽어봐야겠어요.
그리고 당시 푸시킨 시에 대한 나보코프의 주석에는 킨보트처럼 선을 넘을듯말듯한 부분들이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독자나 평론가들이 '저샛기 멍청이 아니야?'라는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꽤 거센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창백한 불꽃이 출간됐고.... 바보같은 주석자를 스스로 연기한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죠. 현실에서 킨보트를 연기한 거. 나보코프는 그냥 모든게 장난(?)이었던 것 같아요. 유희. 즐거움. 게임 등등...
나보코프는 실제로도 추리 게임이나 체스 그리고 퍼즐 등 머리쓰는 싸움을 즐겼다고 해요. 재능도 있고요. 그는 소설 자체도 그렇게 여긴 듯 해요. 증거로 그는 본인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딱히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언급했어요. 그냥 도구죠. 그리고 소설을 현실을 반영하고 교훈을 이끌어내는 도구가 아니라 '언어'의 극단에서 줄타기를 하는 언어유희 게임이라더군요. 그래서 과한 해석을 싫어한다고 해요. 사전을 펴놓고 글을 쓰고, 실제 사람보다는 lolita라는 소리에 영감을 얻었을 정도라네요. 그래서 첫 구절에 그 앞니를 두드리는 세음절 롤리타!(맞나?) 라고 말 한 것 같아요.
오래전이지만 롤리타를 보면도 잉?잉?엥?옹?어어? 하면서 소설의 끝에 이르렀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 책과 비슷하네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뤘을 때 회원들이 밀란쿤데라 책을 시리즈로 읽자고 이야기했었는데 그런 욕구를 지금 나보코프에게 강력하게 느낍니다!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포함한 다른 작품을 읽어봐야겠어요.
탈퇴한 회원2019-10-16 13:36
@탈퇴한 회원
그리고 나보코프 천재 맞다네요... 기억이 흐릿했는데 지난 번에 다룬 <생각의 탄생>에 소개된 바로는 나보코프가 패턴인식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다네요. 어떤 곳에서도 패턴을 인식하고 그것을 즐기고.. 더불어 그는 공감각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알파벳 음에서 색을 봤다고 해요. 영어의 a는 비바람에 탈색된 나무의 색 프랑스어 a는 윤을 낸 상아 e와 i로 끝나는 말은 노란색 d는 크림색.,, 등 아돈노,,,
TITLE: 창백한 불꽃
DIRECTOR · WRITER: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BOOK / MOVIE / ETC:
SCORE ★★★★★+★★
REVIEW: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정복기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가 어디에요? 라는 질문에 대한 내 답은 언제나 하나다! 문학동네 - 그 이유는요? 글쎄요. 아무래도 문학전집때문인 것 같아요. 문학동네 전집이 가장 좋나요? 뭐 다른 곳이랑 비교해서 좋다기 보단 책장에 꽂아놓으면 너무 예쁘거든요. 그래서 좋아해요. 제 로망이랍니다.
대충 이런 이유로 많은 문학 전집 중 문학동네를 선택했다. 그리고 읽어왔다. 목표. 졸업 전까지 문학동네 전집 다 읽기 계속 도전 중이다. 리뷰를 쓰기에 앞서 지금까지 읽은 목록을 세어봤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책을 제대로 정독한 것을 기준으로 했다. 가장 최근 출간된 것은 184번 모비딕이다.
005 황금물고기 / 007 위대한 개츠비 / 023 소송 / 027 여명 / 031 숨그네 / 040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055 이날을 위한 우산 / 076 이인 / 094 프랑켄 슈타인 / 099 단순한 열정 / 100 열세걸음 / 101 데미안 / 102 수레바퀴 아래서 / 105 롤리타 / 130 불안의 책 / 133 페스트 / 150 제5도살장 / 154 오만과 편견 / 165 밤은 부드러워라 / 177 창백한 불꽃 / 178 슈틸러 / 179 시핑뉴스 총 22권
아직 1백여권 이상이 남았다. 큰일났네. 방금 알았다. 그동안 이 목표를 여유롭고 기분 좋은 상태에서만 꺼내보는 것 정도로 취급하기도 했고 졸업 전까지 라는 구체적인 시기를 산정할 때만 해도 같은 졸업 전까지 170권을 읽으려면... 170나누기 4는.. 같은 수학적 사고를 하지 못했다. 어쨌든,,, 한 번 도전해보려고 한다. 졸업을 못하던지. 책을 다 못 읽던지. 죽기야 하겠어?
"one cannot read a book : one can only reread it"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우리에게는 로리타 콤플렉스의 기원인 소설 <롤리타>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나보코프는 뉴욕의 웨슬리칼리지와 코넬대학에서 문학 강의를 했고 한다. 위 구절은 그가 학생들에게 문학을 대하는 태도로 늘 강조했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경구다. “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없다. 오직 읽고 또 읽는 수 있을 뿐이다” 흐음.. 무슨 말이지. 모호하고, 의미심장하고, 간질간질한 이 말의 의미는 재독 시 가끔 떠오르는 ‘다시 읽으니 새롭네!’ 혹은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등의 감상으로 혹은 책을 덮은 후 '잉 무슨내용이었지?'하는 허탈함으로 경험해보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생각은 나보코프의 다른 책을 리뷰하며 제대로 다루려고 한다. 이 말의 다른 버전으로는 “읽고 또 읽던지(re-read), 아니면 읽고 또 읽고 또 읽던지(re-re-read)” 가 있다
그리고 그는 그럴 수밖에 없는 책을 만들어냈다. 이 책 <창백한 불꽃>. 책을 펼친 건 지난 추석 연휴였다. 하루 동안 온전히 책만 읽기 위해 교외의 카페를 찾았다. 그렇게 시작한 이 책은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냥 덮을 수가 없었다. 좆망테크타는 미친놈이 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굉장히 긴장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계속 읽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도 읽고, 하차 후 정거장 앞 탐탐에 들어가 다시 읽었다. 결국 끝까지 읽고 거기다 몇 번 더 책을 들쑤시고 동이 트고 나서야 카페를 나설 수 있었다.
책을 쥐고있던 당시에는 딱히 재미있다는 감상은 없었다. 하지만 후에 깨달았다. "x발 진짜 개쩐다!" 진짜 재밌다는 사실을. 이 책은 그동안 만난 문학 작품 중 가장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우선 작품의 제목과 같은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가 소개된다. 그리고 이 시와 함께 그의 친구이자 같은 대학에서 일하는 동료 교수 킨보트의 주석, 이 두가지가 주요 내용이다.
찰스 킨보트. 대학 교수인 그는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의 주석자이며 이 책의 서술자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이 시의 창조자에 대한 찬사와 함께 자신이 시의 주석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시의 주인은 존 프랜시스 셰이드다. 셰이드는 킨보트와 같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꽤 저명한 시인이다. 셰이드와 킨보트는 서로 바로 이웃한 집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각별한 사이로 보인다. 갑작스러운 셰이드의 죽음 이후, 미완성된 작품 '창백한 불꽃'을 두고 세간에서 한바탕 논쟁이 있었다. 이에 킨보트는 출판에 있어서 만큼은 시인의 진정한 친구이며 작품의 탄생 과정을 낱낱이 살펴본 자신이 편집과 출판을 담당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인의 아내 시빌 셰이드는 (킨보트가 평가하기로) 시인에 대한 연구에 집착하는 다른 사람들을 편집인으로 두기를 원했고 어쩔 수 없이 킨보트는 외곽의 모텔에서 홀로 주석 작업을 시작한다.
다시 책의 구성에 대해 설명하겠다.
머릿말 +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 + 주석 + 인덱스
이는 시인 사후 주석자인 킨보트가 출판한 것이며 ‘시’보다는 그의 ‘주석’이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머릿말(주석자 킨보트) +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셰이드) + 주석(킨보트) + 인덱스(킨보트)
그리고 문학동네에서 1만 5천원에 판매 중인 이 활자 덩어리들은 나보코프의 소설이다. 셰이도와 킨보트 모두 허구의 인물일 뿐이다.
킨보트의 머릿말(나보코프) +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나보코프) + 킨보트의 주석(나보코프) + 킨보트의 말도안되는 인덱스(나보코프)
아무 정보없이 이 책을 고른 후 내가 맞닥뜨린 충격은 이렇다.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가 원래 존재하고 그에 대한 리스펙으로 소설을 썼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책의 모든 것이 허구다. 그냥 다! 나보코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도 나보코프가 쓴 것이다. 머리말도, 인덱스도 모두!
<킨보트가 쓴 머리말>
<창백한 불꽃 시행>
<창백한 불꽃 각 시행에 대한 주석>
시도 굉장히 난해하다. 거의 50~60쪽 분량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시구들이 나열된다.
그 행수는 무려 1000행이다. 그리고 각 행마다 주석이 달린다.
미친놈 아니야? 도대체 이런 미친 책을 누가 읽는 거야?
욕이 절로 나온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주로 책을 두권 준비한 다음 시를 읽고 그 시에 대한 주석을 찾아보는 순서로 읽는다. 혹은 킨보트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주석을 읽은 후 시를 다시 보기도 한다. 나는 그런거 1도 몰랐으니... 그냥 순행으로 읽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시를 읽어내고 킨보트의 주석을 봤다.
구성의 핵심은 셰이드의 '시'이나, 소설의 핵심은 주석이다. 주석에서 킨보트가 시구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준다. 그리고 시인이 즐겨 하던 말 등을 근거로 독자에게 해석을 제공한다. 가히 가장 친한 친구답다. 나도 예술가 친구가 있으면 이렇게 애착을 가지고 작품을 남겨진 아이를 돌보듯이 아낄 수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 킨보트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한다.
미친놈이다 미친놈이 나타났다...!!
킨보트는 셰이드를 알고 지낸지 몇개월에 불과하다고 한다. 엥.. 무슨 말은... 같은 부모아래 자란 형제보다 더 돈독하게 하더만... 게다가 킨보트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셰이드 부부는 그를 싫어한다. 특히 아내인 시빌 셰이드는 그를 노골적으로 피한다. 게다가 대학에서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주변인들은 킨보트를 대놓고 혐오한다.
하지만 킨보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안 좋은 말들은 그저 위대한 시인 셰이드가 자신에게 주는 ‘특별한 애정’을 시기 질투해서 내뱉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날 일 없다고 처음엔 킨보트의 시각에서 사람들을 바라보지만 그런 언급이 반복되니 이제 킨보트가 정신이 이상한가?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게다가 킨보트는 셰이드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상한 말을 덧붙이는데.
사실 킨보트는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창문 너머로 2백여 미터 앞에 위치한, 가장 친한 친구의 집에서 열리는 꽤 많은 사람이 모인 파티를 바라만 봐야 했다. 여기서 셰이드는 아마도 킨보트 만큼 아니 킨보트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킨보트는 주석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셰이드의 행동을 바라보는 시각만큼 그의 '시'도 극히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는데.
위 시구는 셰이드가 자신의 딸에 대해 쓴 부분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외모의 결함으로 늘 혼자 있었던 죽은 딸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앞뒤 좌우 동북 북서 남동 동서 나발이고 어떤 방향으로 봐도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 킨보트는 이런 주석을 단다.
더불어 킨보트는 실존하지 않는 유럽 국가인 ‘젬블라’라는 국가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곳이 자신의 조국이라 말한다.
이와 관련한 킨보트의 주장은 이러하다. 자신은 젬블라 출신이다. 젬블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왕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혁명이라는 두 단어로 정리되는 역사 이면에는 스펙터클한 이야기가 있고 자신이 그 목격자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셰이드에게 전해주었으며 (그가 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그 이야기에 매료되어, 비밀스러운 한 나라의 역사를 시로 만들어 남겨놓았다. 그래서 킨보트가 그토록 이 시에 집착하는 것이다. 자신의 왕국인 젬블라에게 바치는 시라면서.
그리하여 셰이드의 시의 조각들은 폭풍처럼 몰아치는 젬블라의 혁명을 시간마다 혹은 사건마다 새겨놓은 기록으로 변모한다. 킨보트는 또한 젬블라에서의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마치 자신이 젬블라 왕이었다는 것을 은근슬쩍 암시한다. 자신이 왕임을 밝힐 때 당황할 셰이드의 표정을 상상하며 흐뭇해하는 모습은 진짜 왕인지 아닌지 상관없이 패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킨보트는 셰이드를 사랑한다. 이미 젬블라의 이야기를 하며 그의 동성애적 취향을 드러낸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셰이드를 친구나 동료로써 존경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 집착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큰 담론을 파고드는 도전정신보다는, 어린 시절 넬레 노이하우스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 추리 소설을 읽을 때의 것이다. 또 스트레스로 돌아버릴 것 같은 일상에서, 진짜 미쳐버렸거나 위대하거나 그 경계에 있는 인물의 미친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의 짜릿함이다. 내용 소개는 여기까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당시 막스 프리슈의 <슈틸러>를 함께 읽고 있었는데 이 주인공도 자아를 부정하는 미친놈이라 진짜 정신병 옮는 줄 알았다.
위 설명들이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을 덮은 후에도 셰이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킨보트는 젬블라의 왕 찰스와 동일한 인물인지 과대망상증인지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는 진정 셰이드가 쓴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소설 전체에 흩뿌려진 단서들을 모아 나름의 답을 찾는 것 밖에 없다. 마치 이누야샤나 손오공이 사혼의 구슬과 드래곤 볼을 찾으러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그게 재밌는게 함정.
셰이드의 의도를 자신의 마음대로 어처구니없이 해석하는 킨보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쪽팔림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들을 때의 기분이랄까. 나보코프는 과잉해석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독자들에게 자유롭게 뛰놀 공간을 제시한 것일까. 이 책이야말로 함께 읽고 이야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재독을 하러 떠나겠다. 3번 읽으면 그때는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진짜 글 다운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책 또는 문학에 대한 언급
맨 처음 소개한 문장의 원텍스트
“... one cannot read a book: one can only reread it. A good reader, a major reader, an active and creative reader is a rereader. And I shall tell you why. When we read a book for the first time the very process of laboriously moving our eyes from left to right, line after line, page after page, this complicated physical work upon the book, the very process of learning in terms of space and time what the book is about, this stands between us and artistic appreciation. When we look at a painting we do no have to move our eyes in a special way even if, as in a book, the picture contains elements of depth and development. The element of time does not really enter in a first contact with a painting. In reading a book, we must have time to acquaint ourselves with it. We have no physical organ (as we have the eye in regard to a painting) that takes in the whole picture and can enjoy its details. But at a second, or third, or fourth reading we do, in a sense, behave towards a book as we do towards a painting. However, let us not confuse the physical eye, that monstrous achievement of evolution, with the mind, an even more monstrous achievement. A book, no matter what it is - a work of fiction or a work of science (the boundary line between the two is not as clear as is generally believed) - a book of fiction appeals first of all to the mind. The mind, the brain, the top of the tingling spine, is, or should be, the only instrument used upon a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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