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창백한 불꽃 : 아, 나보코프 나보코프 나보코프!

조회수 1856

TITLE: 창백한 불꽃 

DIRECTOR · WRITER: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BOOK / MOVIE / ETC:

SCORE ★★★★★+★★

REVIEW: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정복기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가 어디에요? 라는 질문에 대한 내 답은 언제나 하나다! 문학동네 - 그 이유는요? 글쎄요. 아무래도 문학전집때문인 것 같아요. 문학동네 전집이 가장 좋나요? 뭐 다른 곳이랑 비교해서 좋다기 보단 책장에 꽂아놓으면 너무 예쁘거든요. 그래서 좋아해요. 제 로망이랍니다. 

대충 이런 이유로 많은 문학 전집 중 문학동네를 선택했다. 그리고 읽어왔다. 목표. 졸업 전까지 문학동네 전집 다 읽기  계속 도전 중이다. 리뷰를 쓰기에 앞서 지금까지 읽은 목록을 세어봤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책을 제대로 정독한 것을 기준으로 했다. 가장 최근 출간된 것은 184번 모비딕이다. 

005 황금물고기 / 007 위대한 개츠비 /  023 소송 / 027 여명 / 031 숨그네 / 040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055 이날을 위한 우산 / 076 이인 / 094 프랑켄 슈타인 / 099 단순한 열정 / 100 열세걸음 / 101 데미안 / 102 수레바퀴 아래서 / 105 롤리타 / 130 불안의 책 / 133 페스트 / 150 제5도살장 / 154 오만과 편견 / 165 밤은 부드러워라 / 177 창백한 불꽃 / 178 슈틸러 / 179 시핑뉴스 총 22권

아직 1백여권 이상이 남았다. 큰일났네. 방금 알았다. 그동안 이 목표를 여유롭고 기분 좋은 상태에서만 꺼내보는 것 정도로 취급하기도 했고  졸업 전까지 라는 구체적인 시기를 산정할 때만 해도 같은 졸업 전까지 170권을 읽으려면... 170나누기 4는..  같은 수학적 사고를 하지 못했다. 어쨌든,,, 한 번 도전해보려고 한다. 졸업을 못하던지. 책을 다 못 읽던지. 죽기야 하겠어?




"one cannot read a book : one can only reread it"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우리에게는 로리타 콤플렉스의 기원인 소설 <롤리타>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나보코프는 뉴욕의 웨슬리칼리지와 코넬대학에서 문학 강의를 했고 한다. 위 구절은 그가 학생들에게 문학을 대하는 태도로 늘 강조했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경구다. “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없다. 오직 읽고 또 읽는 수 있을 뿐이다”  흐음.. 무슨 말이지. 모호하고, 의미심장하고, 간질간질한 이 말의 의미는 재독 시 가끔 떠오르는 ‘다시 읽으니 새롭네!’ 혹은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등의 감상으로 혹은 책을 덮은 후 '잉 무슨내용이었지?'하는 허탈함으로 경험해보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생각은 나보코프의 다른 책을 리뷰하며 제대로 다루려고 한다.  이 말의 다른 버전으로는 “읽고 또 읽던지(re-read), 아니면 읽고 또 읽고 또 읽던지(re-re-read)” 가 있다

그리고 그는 그럴 수밖에 없는 책을 만들어냈다. 이 책 <창백한 불꽃>. 책을 펼친 건 지난 추석 연휴였다.  하루 동안 온전히 책만 읽기 위해 교외의 카페를 찾았다. 그렇게 시작한 이 책은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냥 덮을 수가 없었다. 좆망테크타는 미친놈이 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굉장히 긴장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계속 읽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도 읽고, 하차 후 정거장 앞 탐탐에 들어가 다시 읽었다. 결국 끝까지 읽고 거기다 몇 번 더 책을 들쑤시고 동이 트고 나서야 카페를 나설 수 있었다. 

책을 쥐고있던 당시에는 딱히 재미있다는 감상은 없었다. 하지만 후에 깨달았다. "x발 진짜 개쩐다!" 진짜 재밌다는 사실을. 이 책은 그동안 만난 문학 작품 중 가장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우선 작품의 제목과 같은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가 소개된다. 그리고 이 시와 함께 그의 친구이자 같은 대학에서 일하는 동료 교수 킨보트의 주석, 이 두가지가 주요 내용이다. 





인간의 삶이란 난해한 미완성의 시에 붙인 주석같은 것


창백한 불꽃. 99행의 영웅시격 2행 연구로 이루어진 이 시는 총 네편으로 구성되었으며, 존 프랜시스 셰이드(1898년 7월 5일 출생, 1959년 7월 21일 사망)가 생애 마지막 스무날 동안 미국 애팔래치아 지방 뉴와이의 자택에서 집필하였다. 예의 그 유쾌한 새들과 환일이 나오는 짧은 제 1편은 (색인)카드 열 세장 분량이다. 열분이 가장 좋아하는 제 2편과 충격적인 역작인 제 3편은 길이가 같고(334행), 각각 스물일곱 장씩이다. 제 4편은 길이면에서 제2편으로 되돌아가 다시 열세 장 분량인데, 그 중 셰이드가 죽던 날에 쓴 마지막 네장의 카드는 ‘정서본’이 아니라 ‘교정을 본 초고’상태다. _ p17



찰스 킨보트. 대학 교수인 그는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의 주석자이며 이 책의 서술자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이 시의 창조자에 대한 찬사와 함께  자신이 시의 주석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시의 주인은 존 프랜시스 셰이드다. 셰이드는 킨보트와 같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꽤 저명한 시인이다. 셰이드와 킨보트는 서로 바로 이웃한 집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각별한 사이로 보인다. 갑작스러운 셰이드의 죽음 이후, 미완성된 작품 '창백한 불꽃'을 두고 세간에서 한바탕 논쟁이 있었다. 이에 킨보트는 출판에 있어서 만큼은 시인의 진정한 친구이며 작품의 탄생 과정을 낱낱이 살펴본 자신이 편집과 출판을 담당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인의 아내 시빌 셰이드는 (킨보트가 평가하기로) 시인에 대한 연구에 집착하는 다른 사람들을 편집인으로 두기를 원했고 어쩔 수 없이 킨보트는 외곽의 모텔에서 홀로 주석 작업을 시작한다. 



단언컨대. 내 주석 없이 셰이드의 시만으로는 인간적인 사실성을 갖지 못한다. 저자가 무심코 배제해 의미심장한 시행이 상당히 생략된 그의 시 같은 작품이 갖는 인간적 사실성은 저자와 주변 환경, 성향 등의 사실성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오직 나의 주석만이 이 사실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언에 나의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다. _ 36p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다

 

다시 책의 구성에 대해 설명하겠다. 

머릿말 +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 + 주석 + 인덱스

 

이는 시인 사후 주석자인 킨보트가 출판한 것이며 ‘시’보다는 그의 ‘주석’이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머릿말(주석자 킨보트) +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셰이드) + 주석(킨보트) + 인덱스(킨보트)


그리고 문학동네에서 1만 5천원에 판매 중인 이 활자 덩어리들은 나보코프의 소설이다. 셰이도와 킨보트 모두 허구의 인물일 뿐이다. 

킨보트의 머릿말(나보코프) +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나보코프) + 킨보트의 주석(나보코프) + 킨보트의 말도안되는 인덱스(나보코프)


아무 정보없이 이 책을 고른 후 내가 맞닥뜨린 충격은 이렇다.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가 원래 존재하고 그에 대한 리스펙으로 소설을 썼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책의 모든 것이 허구다. 그냥 다! 나보코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도 나보코프가 쓴 것이다. 머리말도, 인덱스도 모두!














 <킨보트가 쓴 머리말>


 

<창백한 불꽃 시행>

<창백한 불꽃 각 시행에 대한 주석>


시도 굉장히 난해하다. 거의 50~60쪽 분량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시구들이 나열된다. 

그 행수는 무려 1000행이다. 그리고 각 행마다 주석이 달린다. 

미친놈 아니야? 도대체 이런 미친 책을 누가 읽는 거야? 

욕이 절로 나온다. 





참된 예술은 일반인의 눈으로 지각되는 보통의 ‘사실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것만의 특별한 사실성을 창조하는 법이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주로 책을 두권 준비한 다음 시를 읽고 그 시에 대한 주석을 찾아보는 순서로 읽는다. 혹은 킨보트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주석을 읽은 후 시를 다시 보기도 한다. 나는 그런거 1도 몰랐으니... 그냥 순행으로 읽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시를 읽어내고 킨보트의 주석을 봤다. 

구성의 핵심은 셰이드의 '시'이나, 소설의 핵심은 주석이다. 주석에서 킨보트가 시구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준다. 그리고 시인이 즐겨 하던 말 등을 근거로 독자에게 해석을 제공한다. 가히 가장 친한 친구답다. 나도 예술가 친구가 있으면 이렇게 애착을 가지고 작품을 남겨진 아이를 돌보듯이 아낄 수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 킨보트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한다. 


 

미친놈이다 미친놈이 나타났다...!!




어쨌든 그는 참으로 소중한 친구다! 달력을 보니 그를 알고 지낸 건 수개월 밖에 안되지만 - 24p


킨보트는 셰이드를 알고 지낸지 몇개월에 불과하다고 한다. 엥.. 무슨 말은... 같은 부모아래 자란 형제보다 더 돈독하게 하더만... 게다가 킨보트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셰이드 부부는 그를 싫어한다. 특히 아내인 시빌 셰이드는 그를 노골적으로 피한다. 게다가 대학에서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주변인들은 킨보트를 대놓고 혐오한다. 


그 성깔 고약한 부인이 식료품점 한가운데에서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불쾌한 사람이야. 존과 시빌이 당신을 어떻게 참고보는지 몰라." 내가 점잖게 미소 짓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이렇게 덧붙였다. "게다가 제정신도 아니군."


하지만 킨보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안 좋은 말들은 그저 위대한 시인 셰이드가 자신에게 주는 ‘특별한 애정’을 시기 질투해서 내뱉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날 일 없다고 처음엔 킨보트의 시각에서 사람들을 바라보지만 그런 언급이 반복되니 이제 킨보트가 정신이 이상한가?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게다가 킨보트는 셰이드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상한 말을 덧붙이는데. 


이런 일에 다시는 휘말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나의 시인과 조용히 저녁시간을 보내며 위안을 얻기를 순전하게 기대하면서 아르카디아에 도착했을 때 워드스미스대학의 시계가 6시를 쳤다. 내가 현관 의자에 올려두었던, 리본으로 장식한 납작한 상자를 보고서야 그의 생일을 그냥 넘길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젠가 나는 그의 어떤 책 표지에서 그 날짜를 발견했고, 그의 아침 식사 복장이 심히 낡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서둘러 옷을 벗고 좋아하는 성가를 목청껏 불러대며 샤워를 했다. ... 즉석 생일 파티만큼 외로운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일도 없으니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전화가 온종일 울려댔을 생각에, 아니 그랬을 것만 같아 유쾌한 기분으로 셰이드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물론 시빌이었다. ”


“봉 수아. 시빌”

“아. 안녕하세요. 찰스. 여행은 잘 하셨어요?”

“글쎄요, 사실은 .......”

“저기, 존을 찾으시는 건 아는데, 그 양반이 지금 휴식을 취하고 있거든요. 저는 죽도록 바쁘고요. 그이가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릴거예요. 괜찮죠?”

“나중 언제요. 오늘밤에요?”

“아니요. 아마 내일쯤. 초인종이 울리네요. 그럼 안녕히.”


이상도 하다. 하녀와 조리사 말고도 흰상의를 입은 임시 고용인이 둘이나 되는데 왜 시빌이 초인종에 귀를 기울여야 했을까? 그릇된 자존심 때문에 나는 했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내 고귀한 선물을 옆구리에 끼고 손님을 박대하는 그 집으로 침착하게 걸어갔어야 했는데. 누가 알랴. 뒷문에서 조리용 셰리주 한 모금을 보답으로 받았을지. 나는 뭔가 착오가 있으리라는 희망을 여전히 품고, 셰이드가 전화해주길 기다렸다. 쓰디쓴 기다림이었다. 


사실 킨보트는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창문 너머로 2백여 미터 앞에 위치한, 가장 친한 친구의 집에서 열리는 꽤 많은 사람이 모인 파티를 바라만 봐야 했다. 여기서 셰이드는 아마도 킨보트 만큼 아니 킨보트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킨보트는 주석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셰이드의 행동을 바라보는 시각만큼 그의 '시'도 극히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는데. 


2분마다 전화벨이 울리지만 

그애를 찾는 전화는 없이리라. 그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하얀 스카프를 맨 미남이

요란하게 타이어 소리를 내며 자갈길을 달려 

그애에게 오는 일은 결코 없을 테고

창백한 불꽃 330-334행


위 시구는 셰이드가 자신의 딸에 대해 쓴 부분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외모의 결함으로 늘 혼자 있었던 죽은 딸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앞뒤 좌우 동북 북서 남동 동서 나발이고 어떤 방향으로 봐도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 킨보트는 이런 주석을 단다. 


334행 : 그애에게 오는 일은 결코 없을 테고


‘그가 제 발로 나에게 오는 일이 한 번이라도 있을까?’ 

나는 호박빛과 장밋빛으로 물든 어느 황혼 무렵, 

내 탁구 친구나 존 셰이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궁금해하곤 했다. 


더불어 킨보트는 실존하지 않는 유럽 국가인 ‘젬블라’라는 국가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곳이 자신의 조국이라 말한다.


12행 : 크리스털 나라 


아마도 나의 사랑하는 조국 젬블라를 암시하는 듯. 초고에는 내용이 연결되지 않고 

반쯤 지워져 있어 제대로 판독한 것인지 확신할 순 없지만 이 행다음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아, 나는 잊지 말고 말해야 한다. 


내 친구가 얘기해준 어떤 왕에 대해. 


이와 관련한 킨보트의 주장은 이러하다. 자신은 젬블라 출신이다. 젬블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왕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혁명이라는 두 단어로 정리되는 역사 이면에는 스펙터클한 이야기가 있고 자신이 그 목격자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셰이드에게 전해주었으며 (그가 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그 이야기에 매료되어, 비밀스러운 한 나라의 역사를 시로 만들어 남겨놓았다. 그래서 킨보트가 그토록 이 시에 집착하는 것이다. 자신의 왕국인 젬블라에게 바치는 시라면서. 


“그뿐 아니라.” 나는 광막한 석양을 향해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그와 함께 걸어내려가며 계속 말했다. 

“당신의 시가 완성되자마자, 젬블라의 영광이 당신이 쓴 운문의 영광과 합쳐지자마자 나는 당신에게 궁극의 진실, 


아주 특별한 비밀을 밝힌 텐데, 듣고 나면 마음이 아주 평온해질 겁니다.” 


그리하여 셰이드의 시의 조각들은 폭풍처럼 몰아치는 젬블라의 혁명을 시간마다 혹은 사건마다 새겨놓은 기록으로 변모한다. 킨보트는 또한 젬블라에서의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마치 자신이 젬블라 왕이었다는 것을 은근슬쩍 암시한다. 자신이 왕임을 밝힐 때 당황할 셰이드의 표정을 상상하며 흐뭇해하는 모습은 진짜 왕인지 아닌지 상관없이 패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킨보트는 셰이드를 사랑한다. 이미 젬블라의 이야기를 하며 그의 동성애적 취향을 드러낸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셰이드를 친구나 동료로써 존경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 집착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그리고 언제나, 내 사랑
당신도 거기에, 단어의 밑에, 음절 위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리듬에 밑줄을 긋고 강조한다.
먼 옛날에는 여인의 드레스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종종 나는
당신이 생각해내기도 전에 그 소리와 의미를 알아채곤 했다.
당신 안의 모든 것이 젊어서, 당신은 내가 당신을 위해 지은
오래된 시를 인용해 새롭게 만든다.
p90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큰 담론을 파고드는 도전정신보다는, 어린 시절 넬레 노이하우스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 추리 소설을 읽을 때의 것이다. 또 스트레스로 돌아버릴 것 같은 일상에서, 진짜 미쳐버렸거나 위대하거나 그 경계에 있는 인물의 미친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의 짜릿함이다. 내용 소개는 여기까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당시 막스 프리슈의 <슈틸러>를 함께 읽고 있었는데 이 주인공도 자아를 부정하는 미친놈이라 진짜 정신병 옮는 줄 알았다. 


위 설명들이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을 덮은 후에도 셰이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킨보트는 젬블라의 왕 찰스와 동일한 인물인지 과대망상증인지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는 진정 셰이드가 쓴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소설 전체에 흩뿌려진 단서들을 모아 나름의 답을 찾는 것 밖에 없다. 마치 이누야샤나 손오공이 사혼의 구슬과 드래곤 볼을 찾으러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그게 재밌는게 함정. 


셰이드의 의도를 자신의 마음대로 어처구니없이 해석하는 킨보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쪽팔림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들을 때의 기분이랄까. 나보코프는 과잉해석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독자들에게 자유롭게 뛰놀 공간을 제시한 것일까. 이 책이야말로 함께 읽고 이야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재독을 하러 떠나겠다. 3번 읽으면 그때는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진짜 글 다운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 미스터리는 바로 누가 이 작품의 진짜 창작자(들)인가 하는 문제다. 처음 이 작품을 읽는 독자로선 이 문제가 뭐가 어려운지 어리둥절하게 느껴질 것이다. 두 개의 목소리가 확연히 구분되니까. 시인 존 셰이드가 시를 썼고, 주석자 찰스 킨보트가 머리말과 주석과 색인을 썼다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명백한 구분은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이래로 계속 의문이 붙여졌고, 다양한 논의의 불씨가 되었으며 그 불씨는 여전히 연소되지 않은 채 나보코프 독자들과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독해를 시도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해설中> p448





책 또는 문학에 대한 언급



학생들의 과제물에 대해: "나는 대개 아주 너그러운 편이라네[셰이드가 말했다]. 하지만 용서하지 않는 몇 가지 사소한 것들이 있지." 

킨보트: "예를 들면요?" "읽으라는 책을 읽지 않는 것. 읽긴 읽되 바보 천치같이 읽은 것. 그 책에서 상징, 예를 들어 '작가는 녹색이 행복과 좌절의 상징이기 때문에 녹색 잎이라는 뚜렷한 이미지를 사용했다' 따위나 찾는 것 말일세. 또 학생이 '단순하다' '진실하다'라는 표현을 칭찬의 의미로 사용하면 점수를 파국적으로 깎아버리곤 하지. 예를 들면 '셸리의 문체는 매우 단순하고 훌륭하다'라든지 '예이츠는 항상 진실하다' 같은 해석 말이지. 이런 해석은 아주 만연해 있어서, 어떤 비평가가 어떤 작자의 진정성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 비평가나 작자 모두 바보란 걸 알 수 있어." 

킨보트: "하지만 전 고등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고 들었는데요?" "바로 거기부터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뜯어고쳐야 해. 한 아이에게 서른 과목을 가르치려면 서른 명의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네. 중국이나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경도와 위도 차이도 설명할 수 없어 달랑 논 사진 한 장 보여주며 그게 중국이라고 귀찮은 듯 말하는 여선생은 없어야지." 

킨보트: "예, 동감합니다." p194


친애하는 존.˝ 나는 다정하게 그리고 황급히 대답했다. ˝사소한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당신이 시로 변형하면, 사료는 정말 진실이 될 것이고, 그 사람들도 정말 살아 있는 게 될테니까요. 시인에 의해 정화된 진실은 아무런 고통도,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아요. 진정한 예술은 거짓된 명예를 넘어서지요.˝ P264


우리는 불멸의 심상, 복잡한 사상, 말하고 울고 웃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신세계를 담아낼 수 있는 문자 기호의 기적에 가당치도 않게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그 기적을 너무도 단순하게 받아들인다. 야만적일 만큼 타성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 자체로 수렵인으로부터 브라우닝까지, 동굴에 살던 인류로부터 키츠까지 수 세대에 걸쳐 시적 묘사와 구조를 점진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온 역사를 무로 되돌리는 것과 같다. 어느날 우리가 잠에서 깨 우리 모두가 완전히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는 걸 알게된다면 어떨까? 나는 여러분이 자신이 읽는 것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읽을 수 있다는 그 기적에도 놀라서 숨이 막히길 바란다 p356




맨 처음 소개한 문장의 원텍스트 


“... one cannot read a book: one can only reread it. A good reader, a major reader, an active and creative reader is a rereader. And I shall tell you why. When we read a book for the first time the very process of laboriously moving our eyes from left to right, line after line, page after page, this complicated physical work upon the book, the very process of learning in terms of space and time what the book is about, this stands between us and artistic appreciation. When we look at a painting we do no have to move our eyes in a special way even if, as in a book, the picture contains elements of depth and development. The element of time does not really enter in a first contact with a painting. In reading a book, we must have time to acquaint ourselves with it. We have no physical organ (as we have the eye in regard to a painting) that takes in the whole picture and can enjoy its details. But at a second, or third, or fourth reading we do, in a sense, behave towards a book as we do towards a painting. However, let us not confuse the physical eye, that monstrous achievement of evolution, with the mind, an even more monstrous achievement. A book, no matter what it is - a work of fiction or a work of science (the boundary line between the two is not as clear as is generally believed) - a book of fiction appeals first of all to the mind. The mind, the brain, the top of the tingling spine, is, or should be, the only instrument used upon a book.”




최근 출간된 관련 도서 


0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