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서양철학사
DIRECTOR · WRITER: 힐쉬베르거
BOOK / MOVIE / ETC: 중세철학 부분
SCORE ★★★★★
REVIEW:
지식과 신앙의 일치. 이성의 바탕 위에서 믿는 자들을 위해 말했던 시대. 아마 내가 중세에 태어났으면 수도원에 들어갔을것 같다.
교부: 교회의 아빠
교회의 아빠들은 무척 똑똑했다. 교회 아빠들이 신학과 철학을 연결지을 수 있었던 기초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다져놓았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그 나라의 금과 은으로 된 도구들을 가지고 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도 세속적인 학문과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_오리게네스

<오리게네스>
철학은 순수하게 이성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해명하는데 이바지함과 동시에 신앙도 이성을 개발해 나가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자들이 참된 것과 신앙에 알맞은 것을 말할 때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을 빼앗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태도로 인해 비로소 신앙은 신학으로 되고, 선교는 문학으로 되고, 그리스도교는 문화가 될 수 있었다.
신학대학원 학위를 살펴보면 선교학을 전공했을 시 문학석사가 나온다. 왜 문학석사 ? ? 왜 그런지는 중세기의 맥락을 이해하면 알 수 있다!
플라톤 논문 이용해주세요
플라톤 철학이 교부학에 딱 들어맞게 만들어준 사람은 인식의 왕도가 구약성경에 있다고 생각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었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을 터이며, 플라톤은 앗티카의 말을 하는 모세다. _필론

<필론, 성경책 들고있음>
중세에 들어 메토디우스는 <향연>을 인용했고 그대로 모방하기도 했다. 그레고리우스도 <파이돈>을 모방했고, 아우구스티누스도 <파이돈>을 인용했다.
칼키디우스는 <티마이오스> 주해서를 썼고 그건 12세기까지 그리스철학의 으뜸이 되었다.
그러니까 중세는 플라톤의 말을 수천번 되뇌이고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신
그리스도교도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창조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을까?를 무지막지하게 생각했다.
플라톤 <티마이오스>의 경우, 데미우르고스가 영원한 이데아들을 고려해 세계를 창조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도들은 로고스가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다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세계는 신과 완전히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의 빛이 반사된 것이라는 말이었다. 고로 우리는 로고스가 신과 세계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임을 알 수 있게된다.

<사도 요한>
이런 생각은 갑자기 만들어진게 아니라 요한복음의 내용에 적혀있는 것이었다. 요한은 로고스의 개념을 가지고 신의 아들에 관한 기쁜 소식을 헬레니즘세계에 전했다.
중세 철학자들의 탐구와 요한의 기록으로부터 세계와 신의 연결점인 로고스가 공인받게 된다.
고대에는 오직 지혜에 대한 사랑만을 알았지만 지금부터는 그 로고스와 진리가 세상에 내려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
진리는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괴롭혔다.
한때 이 사람은 마니교에 빠져있었는데,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거기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자기가 살아 있고, 회상을 하고, 꿰뚫어보고, 의욕하고, 생각하고, 알며 판단하는 것 등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가 의심할 때에야말로, 그는 살아 있는 것이다.
내가 방활할 때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_ 아우구스티누스

꼭 데카르트의 Cogito를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식의 진리를 발견했고 회의론을 원리적으로 극복했다고 믿었다.
진리의 본질
일반적으로 진리는 긍정이냐 부정이냐 하는 판단의 질을 의미하거나, 어떤 진술이 사태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가리켜 논리적인 진리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 논리적인 진리 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리는 있는 바의 것'이라고 말했다. 진술이 사태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정신 속에 원형이 있다는 말이었다.
신의 본질
신은 진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럼 신이 뭔가?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를 생각하면 된다.
움직이지 않고, 영원하고, 변치 않으며, 완전한 것.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네가 이해한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다. _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뭔 이상한 소리를 하는가 싶기도 하다. 근데 좀만 생각해보면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다.
역지사지다. 개미가 인간을 이해하겠나.
자유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가? 이 질문은 아마 내가 죽어도 답이 안나올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인격은 '의지가 실존적인 것'이었다. 윤리적이라는 것이 곧 의지이며, 의지는 곧 인간이었다.
이 사람은 자연법이 있으며 자연법에는 최고의 선인 신의 윤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윤리는 곧 신의 지혜이며 다른 말로 로고스라고 부른다.
정리해보면 그리스도교에서 윤리적인 것의 핵심은 사랑에 있다. 윤리적인 행위는 곧 의지이다. 의지는 곧 인간이다.
사랑하시오, 그리고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시오 _요한 제 1서에 관한 설교
따라서 위의 공식이 명확하게 성립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초상화는 불타고 있는 심장을 가진 성인으로 그려진다.

<아우구스티누스>
행복
윤리적인 삶의 핵심이 사랑이라면,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삶의 궁극목표와 삶의 완성이 밝혀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삶의 목표와 완성이 행복 속에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복론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키케로, 필론, 플로티노스의 앞선 사상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스스로를 넘어서려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취해도 결코 평안함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것들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가 없다.
인간은 대체로 자기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주관적인 경향에 따라 선을 추구하려 한다.
이래서는 사랑의 참된 목적을 놓쳐 황폐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최고선을 따라 선할 때 비로소 행복해진다.
TITLE: 서양철학사
DIRECTOR · WRITER: 힐쉬베르거
BOOK / MOVIE / ETC: 중세철학 부분
SCORE ★★★★★
REVIEW:
지식과 신앙의 일치. 이성의 바탕 위에서 믿는 자들을 위해 말했던 시대. 아마 내가 중세에 태어났으면 수도원에 들어갔을것 같다.
교부: 교회의 아빠
교회의 아빠들은 무척 똑똑했다. 교회 아빠들이 신학과 철학을 연결지을 수 있었던 기초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다져놓았다.
<오리게네스>
철학은 순수하게 이성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해명하는데 이바지함과 동시에 신앙도 이성을 개발해 나가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자들이 참된 것과 신앙에 알맞은 것을 말할 때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을 빼앗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태도로 인해 비로소 신앙은 신학으로 되고, 선교는 문학으로 되고, 그리스도교는 문화가 될 수 있었다.
신학대학원 학위를 살펴보면 선교학을 전공했을 시 문학석사가 나온다. 왜 문학석사 ? ? 왜 그런지는 중세기의 맥락을 이해하면 알 수 있다!
플라톤 논문 이용해주세요
플라톤 철학이 교부학에 딱 들어맞게 만들어준 사람은 인식의 왕도가 구약성경에 있다고 생각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었다.
<필론, 성경책 들고있음>
중세에 들어 메토디우스는 <향연>을 인용했고 그대로 모방하기도 했다. 그레고리우스도 <파이돈>을 모방했고, 아우구스티누스도 <파이돈>을 인용했다.
칼키디우스는 <티마이오스> 주해서를 썼고 그건 12세기까지 그리스철학의 으뜸이 되었다.
그러니까 중세는 플라톤의 말을 수천번 되뇌이고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신
그리스도교도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창조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을까?를 무지막지하게 생각했다.
플라톤 <티마이오스>의 경우, 데미우르고스가 영원한 이데아들을 고려해 세계를 창조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도들은 로고스가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다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세계는 신과 완전히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의 빛이 반사된 것이라는 말이었다. 고로 우리는 로고스가 신과 세계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임을 알 수 있게된다.
<사도 요한>
이런 생각은 갑자기 만들어진게 아니라 요한복음의 내용에 적혀있는 것이었다. 요한은 로고스의 개념을 가지고 신의 아들에 관한 기쁜 소식을 헬레니즘세계에 전했다.
중세 철학자들의 탐구와 요한의 기록으로부터 세계와 신의 연결점인 로고스가 공인받게 된다.
고대에는 오직 지혜에 대한 사랑만을 알았지만 지금부터는 그 로고스와 진리가 세상에 내려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
진리는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괴롭혔다.
한때 이 사람은 마니교에 빠져있었는데,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거기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꼭 데카르트의 Cogito를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식의 진리를 발견했고 회의론을 원리적으로 극복했다고 믿었다.
진리의 본질
일반적으로 진리는 긍정이냐 부정이냐 하는 판단의 질을 의미하거나, 어떤 진술이 사태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가리켜 논리적인 진리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 논리적인 진리 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리는 있는 바의 것'이라고 말했다. 진술이 사태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정신 속에 원형이 있다는 말이었다.
신의 본질
신은 진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럼 신이 뭔가?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를 생각하면 된다.
움직이지 않고, 영원하고, 변치 않으며, 완전한 것.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
뭔 이상한 소리를 하는가 싶기도 하다. 근데 좀만 생각해보면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다.
역지사지다. 개미가 인간을 이해하겠나.
자유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가? 이 질문은 아마 내가 죽어도 답이 안나올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인격은 '의지가 실존적인 것'이었다. 윤리적이라는 것이 곧 의지이며, 의지는 곧 인간이었다.
이 사람은 자연법이 있으며 자연법에는 최고의 선인 신의 윤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윤리는 곧 신의 지혜이며 다른 말로 로고스라고 부른다.
정리해보면 그리스도교에서 윤리적인 것의 핵심은 사랑에 있다. 윤리적인 행위는 곧 의지이다. 의지는 곧 인간이다.
따라서 위의 공식이 명확하게 성립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초상화는 불타고 있는 심장을 가진 성인으로 그려진다.
<아우구스티누스>
행복
윤리적인 삶의 핵심이 사랑이라면,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삶의 궁극목표와 삶의 완성이 밝혀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삶의 목표와 완성이 행복 속에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복론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키케로, 필론, 플로티노스의 앞선 사상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스스로를 넘어서려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취해도 결코 평안함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것들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가 없다.
인간은 대체로 자기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주관적인 경향에 따라 선을 추구하려 한다.
이래서는 사랑의 참된 목적을 놓쳐 황폐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최고선을 따라 선할 때 비로소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