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탁월한 사유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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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탁월한 사유의 시선

DIRECTOR · WRITER: 최진석

BOOK / MOVIE / ETC: BOOK

SCORE ★★★★★

REVIEW:




살아가다 보면 본질적인 질문들이 나를 덮쳐 올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 직업을 정하기에 앞서 진정 난 무엇을 원하는가? 

- 의미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 진정한 친구란 무엇일까?

-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단한 생각의 토대를 갖기 위해 계속 몸부림치고 있는 내 무의식이 어느새인가 졸고 있는 의식을 깨우는 소리이다.

마치 불침번이 후번초 깨우는 느낌?  


- "임준혁 병장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럼 나는 잠에서 몹시 불쾌하게 일어나게 된다. 짬을 얼마 먹지 않았을 때는 그런 기상유도 ASMR에 즉각 반응했다. 

그런데 짬을 먹으면 먹을수록 거만해진다. 일어나기 싫어진다. 나를 깨우러 오는 그가 계속 잠자코 있었으면 좋겠다. 

한마디로 게을러 진다. 이런 경우는 신체적인 게으름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질문들도 무의식의 명을 받고 의식을 깨우러 온다. 

이때 보통의 사람들은 불침번이 후번초 깨울 때와 같이 별로 일어나고 싶지 않아한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답습하기를 시작한다(물론 그냥 마저 자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의 말을 끌어와 내 것인 양 논리를 펼치고, 사회적으로 널리 쓰이는 선호도를 토대로 나의 선호를 꾸민다. 

주변의 시선에 맞춰 직군을 고르고, 사회적인 시선으로 고른 직장에서 사회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책임감은 잠시 뒤로 미루고 성실히 가치를 생산해 내는 멋진 회사상의 훌륭한 도구가 된다.

왜냐?


이게 편하니까!


생각하면 골치만 아파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입이 가벼워지면 인생이 무거워 지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입 다물고 있으면 책임에서 쏙 하고 빠져나갈 수 있다.

그것이 내가 무리 속에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든, 내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서 져야하는 책임이든 말이다.


예를 들면, 작가를 하고 싶은데 주변에서는 공학도를 하란다. 

그럼 현실적인 관점에서 점수를 메기고, '합리적'인 판단을 시작한다. 


작가 급여 vs 이공계 급여

작가로서의 성공 확률 vs 이공계에서 무난할 확률

재능의 영역 vs 노력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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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은 아쉽게도 남의 것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무대가 아니다. 나의 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무대이다. 

남의 것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창조자의 곁에서 공백을 메꾸기만 할 뿐이다. 

생각을 들여오는 사람들은 판을 바꿀 수 없다. 

이미 팽배한 관념들을 바탕으로 엎치락 뒤치락할 뿐, 양상을 장악하고 지배할 힘이 있는 존재들은 아니다. 

나은 결과를 내봤자 거기서 거기다. 


답습하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유행이 시작되면 우르르 따라간다. 패션, TV 프로그램에서부터 정책, 제도, 시스템 전반이 항상 뒤늦게 선도하는 무언가를 좇아간다.

좇아가면 어떻게 될까. 선제적인 대응은 없다. 뒤늦은 후진적인 땜질처방만이 있다. 창조는 없고, 비판과 평가만 있다. 

생각을 들여온다. 관념을 사유하는 관념만이 있다. 세계를 그리는 관념은 없고, 관념에 의해 제한되는 세계만 있다. 

모든 이가 생각의 주인자리에서 관념의 노예자리로 밀려난다. 애덤 스미스의 입이 되고, 다윈의 입이 되고, 마르크스의 입이 된다. 

생각을 수입하는 사회가 된다.

책임감이 사라진 사회가 된다.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완벽히 무장한 사람이 아니기에, 주체가 분열된다. 쉽게 말해서, 사회적인 수입철학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나'와 본능적인 사고로 이루어진 존재하는 '나'가 별개의 것이 된다. 

직(職)을 업(業)으로 삼아 자기철학을 구현하는 위치가 사라지니, 책임은 없어진 직장(場)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창조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인문(鱗紋)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즉, 인간이 새겨넣은 무늬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서 덩어리들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익숙한 것들에서 멀어져서 새 통찰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좇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기수가 되어 문명의 깃발을 꽂아넣는 사람들이다. 

관념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관념의 주인이 되어 자기 사고가 자라날 토양에 그것을 거름으로 뿌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입이 된다. 생각을 만들어낸다. 자기가 만들어낸 사고에 자신의 책임을 견지하는 사람들이다.

판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경쟁 밖으로 나와 경쟁 자체를 쥐고 흔드는 사람이다. 

은유를 하는 사람으로서 서로 다른 것들을 비틀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예술가인 것이다.

피아노로 시대의 흐름을 새겨넣으면 음악가, 글로서 한다면 작가, 프로그래밍으로 해낸다면 개발자. 자기 분야에서 인문을 읽는 사람들이다.




통찰의 바늘이 가리키는 끝에는 우리 사회가 있었다.

물론 자기가 갖고 있는 직을 업으로 삼고, 책임감있게 맡은 바 일을 수행하며 본인의 자리에서 묵묵히 견디고있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목격해왔던 것은 직업의식, 소명의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식의 책임 돌리기는 기본이었다.

책임의식이 부재한 썩은 물의 망망대해에서 관성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 부표처럼 부유한 채, 악취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조차 결여된 상태로 잊을만 하면 들어닥치는 부패의 향연을 익숙한 몸짓으로 요리조리 피해다녔다.

이곳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질문들이 입 밖으로 터져나올 때마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생각하지마~ 어짜피 안바뀌어~" 였다.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요리조리 피해다니는 무빙을 체화한 내가 취해야 했던 최적의 행동은, 앞에서는 호방하게 웃되, 뒤에서는 철저하게 반성하며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서 분석한 내용을 노트 위에 적어두곤 했다.

소심한 나의 태도에 통찰의 창 끝은 나 또한 가리키고 있는 듯 했다.




언제 한 번은 연병장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개미떼가 열을 맞춰서 줄지어 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넋을 놓고 줄줄이 일사분란하게 입에 무언가를 물고 왔다갔다 하는 개미들을 보고 있었다.

그중 유독 한마리가 눈에 띄었다. 다른 개미들은 맡은 바 일을 정확히 인지하고 수행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그 한마리는 길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가다가 맞은 편에서 오는 개미와 부딪히면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가 다시 원래 가던 길로 가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저 개미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확률적으로 저 정도의 수가 모이면 농땡이 피우는 친구가 한 둘이 생기는 것이 자연계의 법칙인가?", "아니면 페로몬을 천성적으로 잘 맡지 못하는 친구인건가?" 등등..

그러던 와중에 행보관님께서 오셔서 뭘 하냐고 물으시기에, 짐짓 훈련된 태도로 연병장에서 뜀걸음을 너무 열심히한 나머지 땀이 너무 많이 나던 차에 땀을 식히기 위해 가만히 앉아 있다가 우연히 개미떼가 눈에 들어왔는데 줄지어 가는 모습이 너무 대단하여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고 공손하게 사족을 붙여 말씀드렸다.

행보관님께서는 확신에 찬 말투로 '개미들은 페로몬으로 길을 내고 다녀'라고 말씀하시며 라이터로 그 보이지 않는 페로몬 길을 태우시며 개미들이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그 당시 난 정답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연찮게 몰입하게 된 무엇인가에 매료되어 이런 저런 생각을 엮어보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분께서는 일체의 과정을 가로막고 정해진 답을 나에게 내려주셨다. 


너무 비약 아니십니까?


한국에서 남성으로 태어나면 '의무 교육'을 통해 창조성을 지양하는 경쟁구도와 조직생활을 9년동안 체화하게 되고, 그 끝의 마지막 관문인 '의무 복무'를 통해 '정해진 답의 존재'를 대략 2년여의 기간동안 주입받게 된다.

큰 맥락은 '정해진 답의 존재'라는 점에서 같다. 우리는 고등과정을 포함한 14년의 기간동안 서서히 질문하는 법을 잃게 된다. 


하지만 선도하는 개인들이 존재하는 선도하는 사회는 질문하는 사회다. 

대답은 정해진 것을 꺼내는 과정이고, 관념의 계류지로서 존재하는 나를 확인하는 과정인 반면, 질문은 창의성을 토대로 온전한 관념의 주인인 나로서 존재할 때 가능한 행위인 것이다.




작가의 명징한 통찰의 시선이 첨예하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아직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내 사고의 물꼬를 더 넓게 트이게 해줬다는 점에서 매우 감사한 책인 것 같다.


"隨處作主, 立處皆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처해있는 곳에서마다 주인이 되면, 서있는 곳에서마다 참될 것이다!"


불교의 사상을 관통하는 임제선사의 법어로 내가 참 좋아했던 말이다. 이제 거기에 단어를 하나 더 가미해야될 것 같다.


"처해있는 곳에서마다 (생각의) 주인이 되면, 서있는 곳에서마다 참될 것이다!"


우리 모두 생각의 주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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