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피히테, 쉘링, 슐라이어마허,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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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서양철학사

DIRECTOR · WRITER: 힐쉬베르거

BOOK / MOVIE / ETC: 서양철학사 책

SCORE ★★★★★

REVIEW:


근세철학 부분에서 피히테, 쉘링, 헤겔의 철학 내용을 정리하는겸 적어본다. 감상평은 없다.



피히테



피히테는 삶은 도대체 어떠해야만 하는가? 라고 물었다. 



나는 다시 배고파지고 목마르기 위해 먹고 마실 뿐이다. ... 이렇게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원은 무엇 때문일까? _ 피히테


이 사람은 참된 삶이 오직 신적인 존재 안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행복한 생활에로의 안내]에서 종교적인 것이 인격과 공동체를 형성하는 힘이며, 주관성에 앞서는 것이라고 적었다.


또 종교적인 것이 인류의 역사적 과정을 끝맺고 완성시켜야 한다고 했다. 



점점 나이를 들면서 피히테는 보다 높은 것이 종교적인 진리와 가치들 안에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더 잘 알게 되었고


말기에 피히테는 자기의 사상을 나타내기 위해, 요한복음에 나오는 개념을 즐겨 썼다. 



[행복한 삶에로의 안내]에서, 피히테는 이미 공동체를 형성하는 힘과 사회발전의 최고목표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라고 믿고 있었고 1813년의 국가철학 종강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지상의 전인류는 내적으로 결합된 유일한 그리스도교적인 국가에 의해서 포용되어야 하고, 이런 국가는 공동적인 계획에 따라 자연을 이겨내고, 마침내는 하나의 다른 삶의 높은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쉘링




쉘링은 헤겔 및 헬더를린과 함께 튀빙겐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쉘링은 [계시의 철학]에서, 피히테는 [행복한 삶에로의 안내]에서 요한복음의 머리말에 대한 해석을 썼다. 


모든 것이 앎 안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앎 자체가 이미 신의 실재이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또 신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하나도 없다. 

 

따라서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쉘링은 피히테가 말했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견해는 필론의 [혼합되지 않은 하늘의 지혜] 이후로, 모든 그노시스(영지주의)와 신비주의가 걸어온 길이다. 



슐라이어마허




슐라이어마허는 플라톤을 탁월하게 번역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연구하도록 자극했다. 


슐라이어마허 이후에는 프로테스탄트주의에도 신학적인 기초연구가 있게 되었다. 종교의 본질에 관한 물음에서 칸트는 부정적인 대답을 했었다. 



'나는 앎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는 것이다. 이런 대답이 모든 종교적인 인식에게 불가지론의 위험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에 슐라이어마허는 신앙은 도덕의 강령을 형성하는 것도 아니며, 또 도덕으로 낮춰져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칸트를 거부한다. 


슐라이어마허를 따르자면, 신앙은 오히려 독자적인 것이요, 궁극적인 것이다. 


종교의 교의를 철학적인 사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나, 신학 안에서 철학하려는 것은, 앎과 믿음의 두 영역의 한계선을 옮겨놓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완전히 서로 독립되어 있다. 하느님은 이론적인 사실이 아니라, 느낌의 사실이다. 이는 완전한 낭만주의이며 그는 쉘링과 함께 낭만파에게 중요한 사람이다.



헤겔




헤겔은 피히테의 변증법사상을 받아들인다. 피히테의 변증법은 사물들이 대립하고 있고 '흐른다'고 하는 헤라클레이스토스주의를 새롭게 한 것이다. 



영혼에게는 물이 되는 것이 죽음이고, 물에게는 흙으로 되는 것이 죽음이다.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문장에서 자기의 논리학에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헤겔은 성서, 특히 요한복음서에서, 자기에게 특징적인 것으로 된 것, 즉 신 - 정신 - 진리 - 생명과 길이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25세 때, 예수의 생애를 쓰기 시작한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아무런 제한도 없는 순수한 이성은 하느님 자신이다.


칸트가 모든 형이상학과 특히 신증명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입증한 것은, 앎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을 철학에서 내쫓아버렸으며, 하느님은 그저 신앙의 대상에 지나지 않으며,


슐라이어마허를 따르자면 느낌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들 말해져왔다. 그래서 헤겔은 이런 시대정신을 고려해서 하느님은 죽었다는 명제를 설정한다. 그러나 그는 말을 이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하느님의 본질이라고 한다.


시간이 흘러 진보주의가 급진적으로 되었을 때, 사람들은 헤겔철학의 참된 의미를 무신론이라고 알고, 쇼펜하우어와 비슷하게 범신론을 은근한 무신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헤겔 우파와 좌파라는 두 진영이 이루어진다.


20세기 초 독일에서 신헤겔주의가 생겨났을 때, W. 빈델반트라는 사람은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이미 위대한 사기꾼으로부터 풀려난 줄로 믿고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 자체로 있는 것, 그 스스로를 위해 있는 것, 그 잧체로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 있는 것 이라고 하는 앎애이 없는 말이 다시 시작되려 하는가?


빈델반트는 헤겔을 개혁시켜야 할 이유를, 현대에는 종교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데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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