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중국현대문학사 제3판(북경대출판사, 2011)
DIRECTOR · WRITER: 청광웨이(程光炜) 외 4인
BOOK / MOVIE / ETC: 書
SCORE ★★★★★
REVIEW:
이번에는 북경대출판사 판본에서만 다루고 있는 내용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원본에는 '서론'이라고 쓰여있지만 제 생각에 '모순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중국현대문학사 서술에서 시기구분과 함께 대표적 난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아무튼,
이 모순점들 중에는 중국인이기에 통찰 가능한 부분도 있어서 읽는 동안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우리가 고증 가능한 중국의 역사는 기원전 1600년 경의 은(상)나라부터이다. 그러니까 중국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최소 36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중국’ 혹은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오고 있는 셈이다. 중국 최초의 문학인 시경에 수록된 제일 오래된 시가 기원전 800년 경 주나라 선왕 시대의 노래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중국문학사 전체를 살펴보려면 시간상 최소 2800여 년을 어림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긴 문학사에서 근대 혹은 현대가 차지하는 부분은 대략 110년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70년을 합쳐도 180년이다. 즉, 전체 중국문학사와 비교하면 순수 양적으로만 대략 6.4%의 비중밖에 안된다. 그럼에도 중국문학 연구자들이 20세기를 기점으로 고대와 현대를 굳이 나눈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바로 문학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형식에 발생한 근원적 변화 때문이다. 그 변화는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왕권천수설에 기초한 유교적 봉건주의 붕괴; 서구문물의 침투로 인한 중화사상 붕괴.
- 전통 중국과 현대 중국 사이의 모순
‘현대 중국’에게 ‘전통 중국’은 완전히 청산되어야 하는 적폐였을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중국 지식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천두슈는 1919년 <신청년>에 ‘드어(德, democracy의 de-)’선생과 ‘사이(赛, science의 sci-)’선생을 지지하려면 부득이 공자, 예법, 정절, 구식 예술, 종교 등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고[1], 그보다 1년 앞서 쳰쉬엔퉁은 한자를 폐지하고 알파벳으로 글자를 대체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한자의 복잡함이 교육 보급과 지식 전달을 어렵게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2]


(좌) 민주주의와 과학을 전통 중국과 분리시켰던 천두슈 (우) 한때 한자폐지론을 주장했던 쳰쉬엔퉁
하지만 유교는 종교나 도덕을 넘어 중국인의 사고방식 자체를 의미했고, 한자는 중국인이 지금까지 축적해 온 지식 일체를 의미했다. 후일 문학혁명의 선구자였던 후스는 청나라 소설 홍루몽 연구로 하반생을 보내고, 천두슈는 만년에 한자학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비록 전통과 현대의 분할은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분수령으로 여겨졌지만[3],그 분할 목적은 과격한 전통주의를 비판하면서 전통과 현대 일체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데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4]
또한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중국의 근대화를 주장한 밑바탕에도 ‘以天下为己任(국가의 흥망성쇠를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한다)’이라는 유교 정신이 깔려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루쉰의 경우 또한 그렇다. 루쉰이 의대생에서 소설가로 변신한 계기는 그에게 ‘우매한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질병의 치료가 아닌 ‘정신적 각성’임을 깨닫게 해 준 한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자세한 내용은 to be continued…). 이는 시민사회의 발전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지식인으로서 느낀 위기감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와 개인의 분리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는 동아시아 문화의 전통적 특성으로 볼 수도 있다.
- ‘국민 되기’와 생존적 위기 사이의 모순
‘국민’은 근대 민주정 및 공화정의 탄생에서 나온 개념이다. 국민은 국가와 (백성으로서의)개인 간 위상차에서 근대 이전의 신민(臣民)과는 차이를 보인다. 국민국가에서 개인 지위는 국가에 우선하고, 개인은 암묵적으로 사회계약에 따라 국민 이 될 ‘권리’를 취득한 위치이다. 하지만 신민은 국가에 종속되어 군주의 신하로서 복종할 ‘의무’만을 가진다.
어찌 보면 당연한 차이지만 굳이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중국이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켜 중국에서 2000년 넘게 지속해 온 군주제를 멸망시켰지만, 이 시점으로 신민이었던 백성이 갑자기 국민으로 변할 수는 없었다. 중화민국 초대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혁명파를 무력으로 제압하며 서양과 일본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의 차관을 빌리는 동시에, 일본의 요구(황제 등극 인정해 줄테니 21개조 요구를 들어달라)를 인정하며 군주제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급사한 뒤에는 각지 군벌정부들이 패권을 차지하려 싸움을 벌였다.

(위) 중화민국 초대 총통 위안스카이, 그가 즉위 후 일본과 맺은 21개조 조약에는 일본에 산동 반도를 할양하는 등의 매국적인 내용이 있었다. |
백성들은 한마디로 '그 놈의 혁명이 뭐길래 사람만 맨날 죽어나가냐'며 진이 빠진 상태였다. 계속되는 내전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기에 국민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군주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식인들은 《신청년》등 여러 발간물을 통해 ‘국민’의 가치와 당위성을 알렸지만, 대중에겐 당장 입에 들어갈 만두가 필요할 뿐이었다. 루쉰마저도 이에 동조했다.
“我们目下的当务之急是:一是生存,二是温饱,三是发展。(우리 눈 앞의 급선무는: 첫째로 생존, 둘째로 배부르고 등 따순 것, 셋째로 발전이다) [5]”
- 중일전쟁과 현대화 중단 사이의 모순
1937년 중일전쟁이 문학에 끼친 영향은 한국에서 출판된 현대문학사 교재에도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상세함은 현지 교재보다 빈약하다. 아마 현지 교재는 일본 제국주의 청산→국민당 자산계급 청산으로 이어지는 중국 공산당의 승리 서사가 중요하기에 비중있게 다뤄지는 듯하고, 우리나라 교재는 현지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항전무관론(‘전쟁은 전쟁이고 문학은 문학이다!’)까지도 다루다보니 비중이 덜한 듯하다.

(위) 중일전쟁 당시 일본 항공기의 기습을 받고 있는 옌안 지역 |
무엇보다 ‘중일전쟁은 현대화의 좌절을 직면하게 한 사건’이라는 말은 객관성이 요구되는 외국인 연구자에게서는 좀체 나오기 힘든 서술이다. 청광웨이 등에 따르면 중일전쟁 이전까지 현대화는 5.4운동의 영향 아래 진행되었다. 현대화가 추구하는 계몽 대상도 추상적 개인에 한정되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으로 민족이 외세 침략이라는 위기를 직면한 뒤엔 개인 차원의 ‘봉건주의 청산’과 ‘국민 되기’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일반 대중을 ‘민족’라는 이름 아래 결집시키는,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계몽 주체와, 구체적 대중(중국 본토 무산계급)이라는 계몽 대상이 나타났다.
내 생각에 청광웨이 등은 아마 ‘현대화 중단’이라는 제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의도를 실현하려는 것 같다: 1942년 마오쩌둥의 연안문예강화를 중국현대문학사의 중심 줄기로 이어가는 것; 해방구(공산당 통치 구역)에서 일어난 문학의 전통화와 민족화에 당위성을 부여하며 국통구(국민당 통치 구역)와 윤함구(일본군 통치 구역) 문학을 주변화시키는 것.
- 루쉰의 모순적 사상


루쉰의 입인 사상은 니체의 초인 사상을 기반으로 '노예의 도덕'을 배척하고 '주인의 도덕'을 기를 것, 주체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나갈 것을 주장한다. |
루쉰은 1908년 저술한 <文化偏至论(문화편지론)>에서 입인(立人)사상을 처음 언급한다.[6] 입인 사상에 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체로 ‘민중 개개인을 사회변화를 자각하고 인류 역사의 진화 발전에 앞장서는 주체로 세운다’는 사상으로 볼 수 있다. 신해혁명 이전 루쉰은 그만큼 민중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입인’이 실현될 날이 올 지 장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而今之中国,则正一寂寞境哉。(그러나 지금 중국에는, 그저 하나의 적막함 뿐이다)”[7]
실제로 이러한 회의주의는 신해혁명 이후의 사회혼란에 실망한 루쉰이 수년 간의 칩거에 들어가는 데에 얼마간 영향을 끼친듯 보인다. 후일 문학혁명 이후 발표한 중국 최초의 백화(구어체)소설 <광인일기>에서는 “아이들(봉건주의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세대)을 구하라”는 외침이 있지만, 두 번째 소설집 <방황>의 서문에서는 다시 대중 계몽의 실현에 대한 회의가 엿보인다.
“寂寞新文艺,平安旧战场,两间余一卒,荷戟独彷徨。(신문학은 적막하고, 옛 전장은 평안하다. 그 사이에 남은 한 병사는 창을 들고 홀로 방황한다)”
루쉰은 낙관주의자였을까, 아니면 회의주의자였을까.
[1] 陈独秀,《德先生赛先生》,载《新青年》第1卷6
[2] 钱玄同,《中国今后的文字问题》,载《新青年》第4卷4
[3] 陈独秀,《吾人最后之觉悟》,载《请您杂志》第1卷6
[4] 胡适,《新思潮的意义》,《胡适文存》第4卷,1022-1023页
[5] 鲁迅,<忽然想到 (6)>,《华盖集》
[6] 鲁迅,《文化偏至论》,载《河南》第8卷1
[7] 鲁迅, 앞의 글
TITLE: 중국현대문학사 제3판(북경대출판사, 2011)
DIRECTOR · WRITER: 청광웨이(程光炜) 외 4인
BOOK / MOVIE / ETC: 書
SCORE ★★★★★
REVIEW:
이번에는 북경대출판사 판본에서만 다루고 있는 내용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원본에는 '서론'이라고 쓰여있지만 제 생각에 '모순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중국현대문학사 서술에서 시기구분과 함께 대표적 난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아무튼,
이 모순점들 중에는 중국인이기에 통찰 가능한 부분도 있어서 읽는 동안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우리가 고증 가능한 중국의 역사는 기원전 1600년 경의 은(상)나라부터이다. 그러니까 중국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최소 36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중국’ 혹은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오고 있는 셈이다. 중국 최초의 문학인 시경에 수록된 제일 오래된 시가 기원전 800년 경 주나라 선왕 시대의 노래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중국문학사 전체를 살펴보려면 시간상 최소 2800여 년을 어림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긴 문학사에서 근대 혹은 현대가 차지하는 부분은 대략 110년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70년을 합쳐도 180년이다. 즉, 전체 중국문학사와 비교하면 순수 양적으로만 대략 6.4%의 비중밖에 안된다. 그럼에도 중국문학 연구자들이 20세기를 기점으로 고대와 현대를 굳이 나눈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바로 문학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형식에 발생한 근원적 변화 때문이다. 그 변화는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왕권천수설에 기초한 유교적 봉건주의 붕괴; 서구문물의 침투로 인한 중화사상 붕괴.
‘현대 중국’에게 ‘전통 중국’은 완전히 청산되어야 하는 적폐였을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중국 지식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천두슈는 1919년 <신청년>에 ‘드어(德, democracy의 de-)’선생과 ‘사이(赛, science의 sci-)’선생을 지지하려면 부득이 공자, 예법, 정절, 구식 예술, 종교 등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고[1], 그보다 1년 앞서 쳰쉬엔퉁은 한자를 폐지하고 알파벳으로 글자를 대체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한자의 복잡함이 교육 보급과 지식 전달을 어렵게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2]
(좌) 민주주의와 과학을 전통 중국과 분리시켰던 천두슈 (우) 한때 한자폐지론을 주장했던 쳰쉬엔퉁
하지만 유교는 종교나 도덕을 넘어 중국인의 사고방식 자체를 의미했고, 한자는 중국인이 지금까지 축적해 온 지식 일체를 의미했다. 후일 문학혁명의 선구자였던 후스는 청나라 소설 홍루몽 연구로 하반생을 보내고, 천두슈는 만년에 한자학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비록 전통과 현대의 분할은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분수령으로 여겨졌지만[3],그 분할 목적은 과격한 전통주의를 비판하면서 전통과 현대 일체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데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4]
또한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중국의 근대화를 주장한 밑바탕에도 ‘以天下为己任(국가의 흥망성쇠를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한다)’이라는 유교 정신이 깔려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루쉰의 경우 또한 그렇다. 루쉰이 의대생에서 소설가로 변신한 계기는 그에게 ‘우매한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질병의 치료가 아닌 ‘정신적 각성’임을 깨닫게 해 준 한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자세한 내용은 to be continued…). 이는 시민사회의 발전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지식인으로서 느낀 위기감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와 개인의 분리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는 동아시아 문화의 전통적 특성으로 볼 수도 있다.
‘국민’은 근대 민주정 및 공화정의 탄생에서 나온 개념이다. 국민은 국가와 (백성으로서의)개인 간 위상차에서 근대 이전의 신민(臣民)과는 차이를 보인다. 국민국가에서 개인 지위는 국가에 우선하고, 개인은 암묵적으로 사회계약에 따라 국민 이 될 ‘권리’를 취득한 위치이다. 하지만 신민은 국가에 종속되어 군주의 신하로서 복종할 ‘의무’만을 가진다.
어찌 보면 당연한 차이지만 굳이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중국이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켜 중국에서 2000년 넘게 지속해 온 군주제를 멸망시켰지만, 이 시점으로 신민이었던 백성이 갑자기 국민으로 변할 수는 없었다. 중화민국 초대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혁명파를 무력으로 제압하며 서양과 일본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의 차관을 빌리는 동시에, 일본의 요구(황제 등극 인정해 줄테니 21개조 요구를 들어달라)를 인정하며 군주제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급사한 뒤에는 각지 군벌정부들이 패권을 차지하려 싸움을 벌였다.
백성들은 한마디로
'그 놈의 혁명이 뭐길래 사람만 맨날 죽어나가냐'며 진이 빠진 상태였다. 계속되는 내전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기에 국민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군주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식인들은 《신청년》등 여러 발간물을 통해 ‘국민’의 가치와 당위성을 알렸지만, 대중에겐 당장 입에 들어갈 만두가 필요할 뿐이었다. 루쉰마저도 이에 동조했다.“我们目下的当务之急是:一是生存,二是温饱,三是发展。(우리 눈 앞의 급선무는: 첫째로 생존, 둘째로 배부르고 등 따순 것, 셋째로 발전이다) [5]”
1937년 중일전쟁이 문학에 끼친 영향은 한국에서 출판된 현대문학사 교재에도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상세함은 현지 교재보다 빈약하다. 아마 현지 교재는 일본 제국주의 청산→국민당 자산계급 청산으로 이어지는 중국 공산당의 승리 서사가 중요하기에 비중있게 다뤄지는 듯하고, 우리나라 교재는 현지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항전무관론(‘전쟁은 전쟁이고 문학은 문학이다!’)까지도 다루다보니 비중이 덜한 듯하다.
무엇보다 ‘중일전쟁은 현대화의 좌절을 직면하게 한 사건’이라는 말은 객관성이 요구되는 외국인 연구자에게서는 좀체 나오기 힘든 서술이다. 청광웨이 등에 따르면 중일전쟁 이전까지 현대화는 5.4운동의 영향 아래 진행되었다. 현대화가 추구하는 계몽 대상도 추상적 개인에 한정되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으로 민족이 외세 침략이라는 위기를 직면한 뒤엔 개인 차원의 ‘봉건주의 청산’과 ‘국민 되기’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일반 대중을 ‘민족’라는 이름 아래 결집시키는,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계몽 주체와, 구체적 대중(중국 본토 무산계급)이라는 계몽 대상이 나타났다.
내 생각에 청광웨이 등은 아마 ‘현대화 중단’이라는 제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의도를 실현하려는 것 같다: 1942년 마오쩌둥의 연안문예강화를 중국현대문학사의 중심 줄기로 이어가는 것; 해방구(공산당 통치 구역)에서 일어난 문학의 전통화와 민족화에 당위성을 부여하며 국통구(국민당 통치 구역)와 윤함구(일본군 통치 구역) 문학을 주변화시키는 것.
루쉰은 1908년 저술한 <文化偏至论(문화편지론)>에서 입인(立人)사상을 처음 언급한다.[6] 입인 사상에 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체로 ‘민중 개개인을 사회변화를 자각하고 인류 역사의 진화 발전에 앞장서는 주체로 세운다’는 사상으로 볼 수 있다. 신해혁명 이전 루쉰은 그만큼 민중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입인’이 실현될 날이 올 지 장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而今之中国,则正一寂寞境哉。(그러나 지금 중국에는, 그저 하나의 적막함 뿐이다)”[7]
실제로 이러한 회의주의는 신해혁명 이후의 사회혼란에 실망한 루쉰이 수년 간의 칩거에 들어가는 데에 얼마간 영향을 끼친듯 보인다. 후일 문학혁명 이후 발표한 중국 최초의 백화(구어체)소설 <광인일기>에서는 “아이들(봉건주의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세대)을 구하라”는 외침이 있지만, 두 번째 소설집 <방황>의 서문에서는 다시 대중 계몽의 실현에 대한 회의가 엿보인다.
“寂寞新文艺,平安旧战场,两间余一卒,荷戟独彷徨。(신문학은 적막하고, 옛 전장은 평안하다. 그 사이에 남은 한 병사는 창을 들고 홀로 방황한다)”
루쉰은 낙관주의자였을까, 아니면 회의주의자였을까.
[1] 陈独秀,《德先生赛先生》,载《新青年》第1卷6
[2] 钱玄同,《中国今后的文字问题》,载《新青年》第4卷4
[3] 陈独秀,《吾人最后之觉悟》,载《请您杂志》第1卷6
[4] 胡适,《新思潮的意义》,《胡适文存》第4卷,1022-1023页
[5] 鲁迅,<忽然想到 (6)>,《华盖集》
[6] 鲁迅,《文化偏至论》,载《河南》第8卷1
[7] 鲁迅, 앞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