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실천이성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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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서양철학사

DIRECTOR · WRITER: 힐쉬베르거

BOOK / MOVIE / ETC: 철학사 책

SCORE ★★★★★

REVIEW:




실천이성비판...인간이 왜 존엄하며, 어떻게 하면 존엄성을 얻고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침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윤리적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내용이 꽤나 난해했기 때문에 이해를 위해 철학적으로 접근 할 필요가 있었다.


'도덕규칙을 지켜야한다.' 라는 문장을 접할 땐 '규칙'이 뭔데? 라는 질문을 하면서 읽어야했다. 이번 리뷰에서도 그런식으로 단어를 파헤쳐 나간다.



윤리, 자율성, 규칙



실천이성비판이 도덕을 말하는 이상 '윤리'라는 단어를 파헤쳐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윤리: 그리스어의 ehtos / 라틴어의 mos. 모두 관습이라는 뜻. 고로 이 세상은 윤리 도덕의 근거를 관습에서 찾는다.


1. 칸트는 윤리, 도덕의 근거가 인간의 실천 이성의 자율성에 있다고 보았다. 그럼 자율성은 뭘까. 자율성이란 단어를 파헤쳐보았다.


타율: 다른 사람의 규칙에 복족하는 것

자율: 자기가 세운 규칙에 복종하는 것

임의적인 활동: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



2. 윤리, 도덕의 근거가 인간의 실천 이성의 자율성에 있다 = 우리는 우리의 실천 이성이 세운 도덕규칙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럼 도덕규칙은 뭔가? 규칙은 준칙과 법칙으로 나뉜다. 


준칙: 어떤 행위자가 자기 행위에 규칙으로 삼는 것 

ex) 점수를 매겨야 할 서류들을 무작위로 던져서 A구역에 떨어진 것은  A로 채점, B 구역에 떨어진 것은 B로 채점하는 행위.


법칙: 모두에게 통용되는 객관적인 규칙



3. 우리는 우리의 실천 이성이 세운 도덕규칙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것 = 법칙의 영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우리는 우리의 실천 이성이 세운 모두에게 통용되는 객관적인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윤리, 도덕의 근거는 인간이 스스로 세운 규칙에 복종하는 이성의 자율성에 있다.



정언명령



칸트는 '그 자체로 선한 것은 무엇인가?' 를 묻고 있었다.


선의지는 '무언가가 옳다' 그 하나만을 가지고 행하는 의지를 의미한다. 이해관계에 따른 행동은 포함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예쁜 여자/잘생긴 남자들에게 친절한 것, 선거에 입후보하고 싶은 사람이 친절한 것 등은 그 자체로서 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의지가 아니다.



그럼 무엇이 옳은가? 위에 적어놓은 모두에게 통용되는 객관적 도덕법칙이 옳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의지는 정언명령에 따른 것이다. 정언명령 (정할 정, 말씀 언, 목숨 명, 하여금 령)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명령이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효도하라'라는 말은 명령형이다. 도덕규칙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에 명령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명령한다. 


즉, 무조건적인 명령만이 도덕적인 규칙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도덕 교육




도덕적인 교육은 대부분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으로 귀결난다.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세상 살이가 팍팍해서 그런가.


누군가: 이웃 사람한테 친절해야된다.

배우는 사람: 왜요? 

누군가: 그래야 너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잖아.


이런 가르침을 처세술이라한다. 삶의 전략을 가르치는 것이지 도덕적인 교육은 아닌 것이다. 도덕교육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누군가: 이웃 사람한테 친절해야된다.

배우는 사람: 왜요?

누군가: 그건 인간의 도리야.


그럼 여기서 '인간이 왜 그래야 하는데?'라고 질문하게 된다. 이 질문은 '나의 행동에 상응하는 이익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이익을 구하는 인간의 경향성을 경계했다.



존엄하다는 것




어떤 것이 존엄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서 가치 있을 때 존엄하다. 수단이 될 때 존엄성은 사라진다.


누군가: 그런애랑 왜 놀아? 똑똑한 애들이랑 놀아.


위의 말은 수단적 가치가 없는 자와는 교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변인을 도구로 인식하고 있다. 타인의 존엄성을 무시한 발언이다.



너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공부해.


이런 말도 있다. 나의 상품가치를 올리는 공부. 자기를 수단화 시키는 공부. 스스로 나는 존엄성이 없다고 홍보하고 있는 상태다. 


인간은 존엄성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은 도덕적 이상을 실현할 자율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존엄하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현대의 인간 탐구와 좀 상충되고 있다.



왜냐면 자연과학적 탐구에서 '자유'는 없기 때문이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는데 위와 같은 주장은 '자유'가 스스로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원인을 설명할 수가 없다.


칸트 자신도 자유 개념에 모순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자유의 개념을 빼면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는 딜레마가 있다.



나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자유를 배제한 상태로 특정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려보면 다음과 같은 판결이 나올 수 있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기 때문에 누구나 그런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즉, 환경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말밖에 할 수 없게되어 범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우리는 인간에게 어떤 환경이 주어져도 그 사슬의 힘을 끊어낼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한다.


이것은 곧 인간에게 자유가 있음을 기대하는 말이다.


도덕을 이야기하려면 자유가 존재해야하며 자유는 자연의 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연 세계에서의 자유는 설 자리가 없지만 도덕 법칙이 있는 한 자유라는 것은 있게 된다. 자유의 개념을 도입하지 않으면 인간 행위의 책임성을 물을 수 없기 때문에 '자유'는 칸트 도덕법칙의 핵심이다.



반론



강요에 의한 자리 양보와 자발적 자리 양보가 있다고 생각해 볼 때,


'자발적 자리 양보'는 '자연세계에 있지 않은 어떤 이성적 음성에 의해 행동했다고 볼 수 있다.



반론: 자발적 자리 양보는 자연세계에 있는 정보를 인식해서 하는 행동라 볼 수 있지 않는가?


정보는 교육을 통해서 주입이 된다. 그럼 왜 인간에게 그렇게 주입되는가?  정보 내용을 습득해서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질이 없는 사람은 교육을 받아도 습득/실천하지 못한다.



좀 달라




불교/유교 보은의 윤리: 도움을 받으면 은혜를 갚아야 한다.


기독교/칸트 의무의 윤리: 혜택과 상관없이 의무면 행해야 한다.



기독교/칸트의 윤리를 언제나 실행에 옮기기는 어렵지만 이런 이념을 이상에 놓고 부단히 수행하고 노력하는 것에서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가 나온다.


칸트의 도덕 철학은 현실론이기 보다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며 부단히 노력하라고 권유하는 내용,


공리주의에 따르면 좋다 = 선하다 = 이익 된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나쁘다 = 악하다 = 손해 난다.



공리주의는 이익이 상출할 때 조정의 원리로서는 타당할 수 있지만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의 시점과 관점, 즉 기준과 척도가 명확하지 않다. 


ex) 지금 한국 사람에게는 이익이지만 후세대에겐 손해다. 한국인에겐 이익이지만 일본인에겐 손해다. 기준이 모호하다.


이런 공리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칸트의 윤리 도덕이다.



말세인 이유



'정신' 과 '초월'



물리세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견해를 좀처럼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태도


공리주의에 따른 손익 판단


스스로를, 타인을 도구적으로 대해야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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