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그것들은 잊혀지고 그렇게 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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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버닝

DIRECTOR · WRITER: 이창동

BOOK / MOVIE / ETC: MOVIE

SCORE ★★★☆

REVIEW:

" 저는 아직까지 무슨 소설을 써야 될지 모르겠어요.

  저한테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 _종수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한 사고 실험을 고안했다. " 어떠한 상자에 고양이가 갇혀 있고 1시간 후에 죽을 확률이 절반이라면 만약 한 시간이 지난 후 이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내용이다. 양자 역학의 관점에서 이 고양이는 죽어 있으며 동시에 살아 있다. 말그대로 고양이는 세상에 아직 존재 할 수도 있지만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다.

 이 영화에도 비슷한 고양이 한마리가 있다. 해미의 고양이 보일이 그렇다. 그녀는 자신의 고양이가 낯선 사람이 오면 어딘가에 숨어버린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수는 단 한번도 고양이를 본 적이 없다. 그는 직접 보일의 모습을 본 적도 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단지 그녀의 말을 믿었을 뿐이다. 그에게 보일은 그 말로서만 존재하였다. 믿고자 하면 존재하지만 믿음이 없어지면 고양이도 없어진다. 그에게 세상이란 끝없는 수수께기이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다. 두 작품의 기본 골조와 키워드는 동일하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적어도 영화에서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함은 틀림없다.

 많은 의미를 담은 영화가 으레 그렇듯이 장면과 대사의 밀도가 농밀하다. 군더더기를 최소화하고 영화 거의 전체에 의미를 담았다. 하지만 명확한 선은 없다. 여러 메타포들이 즐비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영화를 보는 관점은 어떤 하나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누군가에겐 단순한 스릴러와 추리물로 각인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처럼 가진 자의 거만함과 못 가진 자에 대한 혐오감, 또 못 가진 자들의 가진자에 대한 열등감 등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중에서 필자는 이 영화에서 리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나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삼정들의 거리>에서 가졌던 생각을 또 다시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믿음'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힘과 그에 따라오는 '존재'에 대한 의미이다.


" 난 내가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가 있어.

   뭐냐면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 먹으면 돼.

   그게 다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 _해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없다는 걸 잊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다. 그러나 그 원천은 다르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되고 없다는 걸 잊는 것은 망각에서 시작된다. 해미의 팬터마임은 망각의 힘을 빌린다. 없다는 것을 잊으면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이는 종수가 가지고 있는 사회의 통념적 생각과 대치 된다. 그를 비롯한 거의 모든 인물들은 증거를 통해 믿음을 얻고, 믿음을 통해 존재를 규명한다. 즉, 증거가 없으면 존재 또한 없다.

" 그러면서 점점더 어두워지면서 노을이 사라지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거야.

  아 내가 세상의 끝에 왔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죽는 건 너무 무섭고 그냥 아예 없었던 것 처럼
  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 _해미

 반대로 그녀의 관점에서 사라지는 것은 믿음으로 촉발된다. 없다고 생각해야 비로소 없어진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부재의 증거는 성립하기 어렵고 무의미하다. 결국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단순히 없다는 사고만으로 존재의 부정이 가능해진다. 그녀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그녀는 정말 사라질 수 있다. 이것이 그녀의 가치관이며 갈망하는 세계이다.


" 걔 이야기 잘 지어내,
   감쪽같이. 
   우리 집 옆에 우물도 없었어. "_해미의 언니

 해미는 종수에게 어렸을 적 우물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마을의 우물에 빠져 갇힌 그녀를 그가 구해줬다며 말한다. 그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였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마을의 이장은 우물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는 몹시 혼란스러워 한다. 마치 고양이에 대한 입장과 같다. 게다가 그녀가 사라지고 들은 그녀의 허영심과 거짓은 더욱 그의 그녀에 대한 사랑과 상충되어 그의 감정을 충동질한다. 그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는다. 고양이, 우물 이야기, 해미 그리고 그녀가 데리고 온 벤이라는 남자. 종수에겐 모든 것이 수수께끼이다.

" 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어요.
   들판에 버려진 낡은 비닐하우스 하나를 골라 태우는거에요.

   난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 들이는 거죠.
   그것들이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건 비 같은 거예요.
   비가 온다.
   강이 넘치고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떠내려 간다.
   비가 판단을 해?

   거기에 옳고 그른 건 없어요.
   자연의 도덕만 있지.
   자연의 도덕이란 동시 존재 같은 거예요.

   난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난 파주에도 있고 반포에도 있다.
   서울에도 있고 아프리카에도 있다. " _ 벤

 벤은 음식을 제물에 빗대며 메타포를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해당 장면에서 이어진다. 해미와 종수 그리고 벤은 모두 대마를 핀다. 여기서 대마는 각자의 진심을 표출시키는 도구이다. 해미는 대마를 피고 '그레이트 헝거'에 대한 경애와 지는 노을을 보며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갈망한다. 또 그것에 따른 순수한 공포로 울음을 터뜨린다. 경계심이 많고 욕구와 감정 표현을 자제하던 종수는 가족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낯선 벤에게 뱉어 낸다. 벤 역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으며 곧 태울 것이라고 종수에게 말한다. 그러면서 필자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인 '동시 존재'를 말한다. 동시 존재는 이분법적 사고를 부정한다. 존재의 통념에 대한 도전이며 의문이다.

" 비닐하우스를 매일 확인했다고요?
   그래도 놓치셨네.

   그럴 수 있죠.

   너무 가까워서 놓쳤을 거에요.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일 수 있어요. " _벤

 그리고 저 장면 이후로 해미가 사라진다. 앞서 언급한 종수의 혼란함이 증폭된 시점이 여기서부터다. 그는 그녀의 실종이 벤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끝에 가서는 벤이 그녀를 살해한 것으로 결론을 짓는다. 하지만 그에 따른 증거는 심증일 뿐이다. 벤의 집에 있었던 고양이는 보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녀의 시계는 우연히 그의 집에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그녀가 카드 빚 때문에 도망을 간 것일수도 있다. 모든 다른 가능성은 존재할 수 있었다. 혹은 종수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의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가능성이든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믿음으로 생겨난 존재의 가치는 망각으로 없어진다. 세상은 그녀를 망각했고 그렇기에 그녀가 없어졌다. 그녀는 잊혀졌기에 그렇게 없어진 것이다. 벤 역시 비닐하우스를 그렇게 묘사했다. 낡고 버려진 기준은 그가 판단하지 않았다. 단지 세상이 그것을 잊었고 그는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러나 종수의 입장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그녀를 잊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열렬히 그녀만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는 아이러니하게 그녀의 존재를 부정케 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그녀의 팬터마임을 떠올려 보자. 어떠한 것이 그 곳에 없다는 것을 잊을 때 비로소 존재케 된다. 즉, 어떠한 것이 그곳에 없다고 믿게 된다면 그것은 사라지게 된다. 그는 고양이와 우물을 통해 그녀의 가치관을 받아 들였고 결국 그녀를 점차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또 그것을 확신하게 하기 위해 벤을 죽였다. 온전한 그녀의 가치관에선 증거가 필요 없었겠지만 종수는 그렇게까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증거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벤을 죽임으로서 그녀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믿을 수 있었다.


 결국 종수의 입장에서 존재와 부재는 믿음에 근거한다. 고양이가 우물이 있다고 믿었기에 그것이 존재하게 되었고 해미가 없다고 믿었기에 해미는 죽은 것이 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정말 벤의 집에서 나온 고양이가 보일이든 아니든, 우물이 있었든 없었든 그리고 해미의 생사여부에 대한 객관적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동시에 그것들은 무의미하다. 오직 유효한 판단은 그의 믿음에서 나올 뿐이다.




 까다로운 작가주의 영화다. 이런 영화는 개인적으로 처음 볼 때만 재밌다. 두번 보면 어지럽고 세번 보면 내가 다시 만들고 싶다. 이해하지 못한 장면도 많다. 아직 종수의 자위 행위나 종수의 어머니만이 우물의 존재를 인정했는지에 대한 정립된 논리적 이해가 없다. 감독의 의도가 있음엔 거진 분명한데 말이다. 그렇다고 굳이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안든다. 보통 작가주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장면마다 담긴 의미를 찾을려고 애쓴다. 나도 옛날엔 그랬다. 하지만 코엔 형제가 감독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영화는 내가 받아들이는 데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버닝>을 이 영화 후에 봐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옛날의 나였다면 이 영화에 들어간 수 많은 메타포와 복선들을 이해할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하고 또 다양한 관점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했다는 그 자체에서 감탄한다. 사회비판적으로 봐도 흥미롭고 스릴러라 가정하고 스토리를 푸는 해석도 기꺼이 즐거울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 아버지의 칼을 사용하여 분노를 표출한 종수의 행동에서 하근찬의 소설 <수난이대>같은 대를 이어 발생하는 갈등을 느끼게 해준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좋은 양분같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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