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소년이 온다

조회수 1986

TITLE: 소년이 온다

DIRECTOR · WRITER: 한강

BOOK / MOVIE / ETC: BOOK

SCORE ★★★★★

REVIEW:



1980년 5월의 광주는 어릴 적 나에겐 교과서 속의 단어였고, 필름 속의 장면이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나에게 5.18은 철 없는 몇몇 주변 친구들의 가십거리였고, 

성인이 된 나에게 5.18은 하나의 사건을 넘어선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내가 책 속에서 옅본 것들은 단어도, 사진도, 가십거리도, 이념도 아니었다. 

어떤 표현으로도 그 무게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상처의 서사였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는 5월의 광주를 두 페이지의 요약되고 정제된 언어와 사진으로 설명한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가운데 5월 18일 광주에서는 계엄 철폐와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신군부는 공수 부대까지 동원하여 시위대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하고 학생와 시민을 대거 잡아들였다.

 분노한 시민들이 전남 도청 앞에 모여 계엄군의 만행을 비판하고 신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일부 시민은 경찰서와 군부대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고 시민군을 조직하여 맞섰다. 민주화 운동은 점차 광주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신군부는 계엄군을 일단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였지만, 언론은 통제하며 광주 시민은 폭도로 몰아갔고 광주로 통하는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였다. 광주 인근 지역에서도 계엄군이 무고한 주민에게 총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 시민은 시민 수습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여 자발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정부에 평화적 협상을 요구하고 나섰다(5.22.). 그러나 계엄군은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면서 시민군이 모여 있던 전남 도청을 장악하였다(5.27.)."

- 미래엔 , 15개정 고등 한국사 교과서


..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 "무장하고 시민군을 조직하여 맞섰다."

..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였다."

..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면서"


작가는 이 생명 없는 단어들에 남루하다 못해 너덜너덜해진 영혼들을 불어넣는다.





작가의 적나라한 묘사와 2인칭 시점은 나를 그 장소로 던져 버렸다.


 총검으로 목이 베여 붉은 목젖이 밖으로 드러난 젊은 남다의 얼굴을 교복 입은 누나가 물수건으로 닦아냈다. 부릅뜬 두 눈을 손바닥으로 힘주어 감겨주고는, 수건을 양동이 물에 헹군 뒤 꽉 비틀어 짰다. 핏물이 후드득 떨어지며 양동이 밖으로 튀었다. 연두색 셔츠를 입은 누나가 양동이를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너, 시간 있으면 오늘만 우리 도와줄래? 손이 너무 모자라. 어려운 건 아니고 ...... 저기 끊어다놓은 천 잘라서 저쪽에 있는 사람들 덮어주면 돼. 너처럼 누가 가족을 찾으러 오면 하나씩 걷어서 보여주고. 얼굴들이 많이 상해서, 옷하고 몸까지 봐야 누군지 확인이 될거야. 

 귀를 찢는 총소리에 모두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공포다! 괜찮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 대열로 돌아가려는 아수라장 속에서 정대의 손을 놓쳤다. 다시 총소리가 귀를 찢었을 때, 모로 넘어진 정대를 뒤로 하고 너는 달렸다. 셔터가 내려진 전자제품점 옆 담벼락에 아저씨 셋과 함께 붙어섰다. 그들의 일행인 듯한 남자가 합류하려고 달려오다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엎어졌다. ⋯⋯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거리 가운데 쓰러진 수십명의 사람들을 봤다. 네가 입은 것과 똑같은 하늘색 체육복 바지가 얼핏 보인 것 같았다. 운동화가 벗겨진 맨발이 꿈틀거린 것 같았다. 네가 뛰쳐나가려는 순간, 입을 막고 떨던 아저씨가 네 어깨를 붙들었다. 동시에 옆 골목에서 청년들 셋이 달려나갔다. 쓰러진 사람들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막 일으키려 했을 때, 광장 중앙의 군인들 쪽에서 연발 총성이 터졌다. 맥없이 청년들이 쓰러졌다. 너는 거리 맞은편의 넓은 골목을 건너다봤다. 삼십여명의 남자와 여자들이 양쪽 담벼락에 붙어서서 얼어붙은 듯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죽은 아이의 입을 빌려 진물, 고름과 피 범벅의 고깃덩어리로 추락해버린 인간을 말한다.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포개져 있었어. 내 배위에 모르는 아저씨의 몸이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고, 아저씨의 배위에 모르는 형의 몸이 다시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어. 내 얼굴에 그 형의 머리카락이 닿았어. 그 형의 오금이 내 맨발에 걸쳐졌어. 그 모든 걸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내 몸에 바싹 붙어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 ⋯⋯ 계속해서 내 몸은 썩어갔어. 벌어진 상처 속에 점점 더 많은 날파리들이 엉켰어. 눈꺼풀과 입술에 내려앉은 쉬파리들이 검고 가느다란 발을 비비며 천천히 움직였어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기도 했다. 혐오가 밀려왔다. 순진한 생각처럼 들릴 수 있지만 나에게는 선(線)이 있었다. 국가가 어떻게 국민을 대상으로 잔혹하게 살육을 자행할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시 군이 먼저 시민들을 향해서 사격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준하고 있는 사람을 옆에서 본다 해도 조준선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난 몇몇 군인을 제외한 대다수가 시민을 조준사격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시민들이 총에 맞아 쓰러진 것도 오발이라고 생각했다. 내 무의식 중의 선이 그 이상의 잔혹성에 대한 가능성을 닫았었다. 그러나 총검과 곤봉은 다르다. 목표가 뚜렷하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살의도 있어야 한다. 내 이웃일 수도 있는 시민들을 칼로 찌르고,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패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도 아주 잔혹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은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남겨진 자들은 어떠한가. 죽은 자들만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 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입니다.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 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자식잃은 부모의 독백은 숨을 들이 마시는 것조차 힘들게 가슴을 조여온다.


그 머시매를 따라갔다이.
머시매 걸음은 빠르고 나는 늙었는디, 아무리 걸어도 따라잡을 수 있어야제. 조금만 옆으로 고개를 돌려주면 옆얼굴이 보일 것인디, 아무 데도 안 둘러보고 앞으로, 앞으로만 가야.
요새 어느 중학생이 그리 짧게 머리를 깎겄냐이. 동그스름한 네 두상을 내가 아는디, 분명히 너였다이.
⋯⋯
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찾아갔을 적에, 네가 그리 순하게 저녁에 들어갈라요,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으까이. 나는 안심을 하고 집에 가서 느이 아부지한테 그랬어야.
여섯시에 문 잠그고 집에 온다요. 다 같이 저녁 묵자고 약속했소.
그란디 일곱시가 되도록 네가 안 들어온게, 느이 작은형하고 나하고 둘이서 집을 나섰다이. 계엄이라 일곱시가 통금인디, 그날 저녁 군대가 들어온다 한게 귀신 그림자도 안 보이더라이. 꼬박 사십분을 걸어서 가본게 상무관에는 불이 꺼지고 아무도 없어야. 도청 앞으로 간게 총 든 시민군들이 지키고 섰드라마는. 우리 막내아들을 만나봐야겠다고 사정한게, 어리디어린 그 시민군들은 파랗게 얼굴이 굳어갖고 안된다고, 아무도 들여보내면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이. 금방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들어온다고, 위험한게 얼른 집으로 가라고만 하더라이.
제발 들어가게 해주고, 하고 나는 빌었어야.
우리 막내 불러라도 주소. 잠깐만 나와보라고 해주소.
보다 못한 느이 작은형이 직접 들어가서 동생을 찾겄다고 한게 시민군 하나가 그러더라이.
지금 들어가면 못 나옵니다. 저 안에는 죽을 각오가 된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느이 작은 형이 알겄다고, 일단 들어가게만 해달라고 언성을 높일 적에 내가 말을 막았다이.
그 아그가 기회를 봐서 제 발로 나올라는 것이여 ⋯⋯ 분명히 나한테 약속을 헀단게.
사방이 너무 캄캄해서 내가 그렇게 말을 했다이. 금방이라도 어둠속에서 군인들이 나타날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이라다가 남은 아들까장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그렇게 너를 영영 잃어버렸다이.






국가가 국민을 이렇게 유린하고 학살할 수 있는가?

내 이웃들을 총검으로 찌를 수 있는가? 그런 부당한 명령을 하달받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무고한 희생을 막으려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놀랍게도 우리 역사였다.  한 세대가 지나가지도 않은 불과 30년 전의 일이다.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7년동안 더 피를 흘려야 했고, 그 결과 우린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엔 많은 부조리들이 산재해있다. 아직도 부당한 압제는 존재한다. 모습만 바뀌었을 뿐. 


작가는 말한다. 

"존엄과 폭력이 공존하는 모든 장소, 모든 시대가 광주가 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과연 우리가 광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2 2